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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Feb 10. 2021

올해 설 차례는 생략합니다.

제사 이야기 




내가 유럽에 나가 살 때도 제사는 한국에서 엄마가 동생들하고 지내셨다. 제사는 물 건너가면 안 된다는 '편리한 규범'에 장손은 못 이기는 체 열외가 되었다.


제사 지내는 당일 아침에 (한국시간 오후) 엄마는 전화로 디데이임을 통보했다. 몇 시간 후, 아내가 제사 시간에 맞추어 한국에 전화를 넣으면, 엄마는 짐짓 놀라신 듯 어떻게 제삿날을 알았냐며 옆에 사람들 들으라고 큰 소리로 물었다. 시집 제사에 책임감이 없는 며느리를 기특한 종부 감으로 위장시키는 엄마의 연출이었다.


우리 집도 얼마 전 까지는 제사가 명절 차례를 포함해서 일 년에 예닐곱 번 정도는 되었다. 할아버지가 둘째 아드님인고로 장손인 내가 물려받은 제사 대代 수가 많은 건 아닌데 할머니가 복수였다. '없는 집 제사 돌아오듯한다'는 속담을 조금은 공감하는 수준이었다.


엄마가 80 세 무렵까지는 제사를 주관하신 것 같다. 주관은 기일을 기억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어디다 적어 놓은 것도 아닌데 엄마는 많은 음력 날짜들을 꼼꼼하게 관리했다. 그만큼 당신께 봉제사의 임무는 막중했다. 엄마는 가끔씩 '아무리 어려워도 제사를 거른 적은 없다'는 묻지 않은 말을 하곤 했다. '신성한' 사명을 다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불평 따위는 잠재웠을 것이다.


한 오 년 전부터 연 중 집안의 제사를 이틀로 줄였다가 급기야 하루에 몰았다. 요즘의 추세이긴 하지만 계기가 된 건 엄마의 선언이었다. '(당신이) 50년 넘게 제사를 모셨으니 할 만큼 했다'였다. 마치 조상님들과 협상해서 통 큰 양보나 받아낸 듯 호기 있게 제사의 졸업을 선언하셨다. 이미 엄마는 제사에서 은퇴하고 역할이 며느리에게 넘어간 때였다. 아내는 당연히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 이었고... 짐작컨대 아들 세대가 기계적으로 치르는 의식을 면제해주면서 며느리한테 본전 안 들이고 생색을 내는 의도도 좀 섞여 있었을 듯 같다.






오랜 세월 바뀌어온 제사는 이제 내용보다 형식만 남은 것 같다.


조선 초기에 제사 지낼 조상의 범위를 벼슬에 따라 6품 이상은 3대 봉사, 7품 이하는 2대 ( 할아버니까지 )로 제한했다고 한다. 당시 논란이 많았던 풍속 사안을 교통정리한 성격이 크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로 오면서 어떻게 된 건지 4대 봉사로 상향 평준화되며 차등 없이 일반화되었다.


사실 '어떻게 된 건지' 짐작이 아주 안 가는 건 아니다. 주자가례를 따랐다고 하는데 그냥 구실 같다. 당시 권고한 제사 지낼 조상의 범위는 의무라기보다는 상한선이었다. 예를 들면 3대에 한해서 제사를 모시되 그 이상은 넘지 말라는 취지다. 분수에 넘치게 부풀리는 민간 풍속을 조정에서 통제한 것이다.


제사를 신분에 따라 규제한다니까 도리어 제사를 빙자해 양반 놀이하는 재미에 허례가 기승을 부리지 않았나 싶다. '족보 사서 제사 지낸다고 뻘건 상놈이 양반이 되나.'라는 속담을 봐도 알 수 있다. 허약한 집안의 뼈대를 제례로 보상해 보려는 심리가 사회 전체 제사 씀씀이의 인플레를 조장했을 터이다. 허리가 휘는 제사 비용은 재산을 종손에게 몰아주는 또 다른 이유가 되었다.


중국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논어 팔일편에서 공자는 노나라 세도가인 계손씨가 천자의 제사를 흉내 내며 참칭하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의 왕이 하늘에 대해 제사를 지낼 수 없고 왕조의 조상신(종묘)과 땅의 신(사직)에만 제사를 지낸 사실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허식은 오늘날 제사상에도 남아있다. 진설할 때 금과옥조처럼 읊조리던 홍동백서, 조율이시 그리고 어동육서 따위 이상한 사자성어는 근거 없는 형식이라고 한다. 어려서 명절 아침에 차례 지낼 때 아버지가 '차례는 단잔單盞'이라고 나지막하게 혼잣말 하시던 걸 기억한다. 제사와 달리 차례는 차림과 절차가 간소했는데 요사이는 차례를 제사상처럼 차려놓고 잔과 절을 몇 차례씩 올리는 집이 있다, 한쪽에서는 잡담들 해가면서. 간식과 식사를 분간하지 못한다. 물량 공세 속에서 정작 경건하게 추모해야 할 조상은 실종되었다.


종교적 신념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는 집도 많다. 종교가 아니라도 오늘날 제사 풍습의 대부분은 미래에 사라질 것 같다. 민속촌이나 안동의 몇몇 종가에 가서 시범적으로 연출하는 제사를 구경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관)혼상제 풍속에서 허식의 거품을 걷어내고 결핍된 본질을 채워 넣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미풍양속이라는 허울에 갇혀 변화를 미적거리며 막대한 사회 비용만 지불하고 있다.




설이 다가오고 있다. 설과 함께 며느리, 만혼의 딸, 구직 중인 아들의 질곡의 시간도 다가오고 있다. 전통시대 선조의 덕을 기리고 친족 간의 화합을 다지는 계기가 됐던 제사 문화가 오늘날 반대로 갈등의 원천이 되고 있다.


추석과 더불어 설 하면 연상되는 키워드는 단연 1위가 귀성 교통이고 그다음이 혹사당하는 며느리의 어깨 정도가 아닐까 한다. 연휴가 확대되면서 일정이 분산되어서 그런지 명절 교통은 꽤 풀리고 있다. 그러나 명절 때 시집에서 겪는 며느리의 고초는 아직 진행 중이다.


이제는 고부간의 수직적 위상도 옛날 같지 않고 심지어 시어머니가 며느리 눈치 보는 세상이다. 그런데 며느리가 명절 때 방문한 시집의 질서는 현재와 단절된 대 과거형이다. 수적으로 우세한 시집 식구들과 갑자기 커진 그들의 목소리에 압도된다. 거기 타성바지 식구도 있지만 데면데면한 시누이 남편들은 전혀 도움이 안 되고, 동서들도 연대할 동지라기보다 경쟁자에 가깝다, 와중에.


기술력보다는 근력이 요구되는 단순 반복 작업을 할당받고 앞치마를 두른다. 부글부글 내연하는 속을 누르며 고난도의 자세를 장시간 인내하니 심신이 병든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미 남편은 피의자로 전환되어 문초를 받기 시작한다. 죄목은 남편이라는 원죄로부터 기간 중의 단순 가담까지 폭이 넓다.


며느리들이 겪는 명절 증후군의 주요 병인은 제수 준비인데 그중에 전 부치기가 으뜸으로 회자된다. 전을 꼭 그렇게 가정 파탄까지 감수하면서 부쳐야 하는지 모르겠다. 기름 냄새 풍겨야 온다는 조상들도 요즘은 내비게이션 찍고도 잘 찾아온다고 믿어보자. 조상들이라고 식성이 그대로일리 없다. 요즘 먹는 음식으로 대접하면 조상 좋고 자손 좋고, 음식 쓰레기도 줄인다.


그래도 옛날 음식이 당기면 배달을 시키면 된다. 케이터링 주문해서 제사상에 올리자고 하면 정성 운운하며 펄쩍 뛰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그렇다. 그러면 조상 얼굴도 모르는 며느리가 쭈그리고 앉아 '내 딸은 나중에 저-얼대로 이런 거 하면 안 돼'라고 주문 외우며 빚는 만두는 얼마나 정성이 들어갔을까?


조선시대에 역병이 돌 때는 명절 차례를 지내지 않았다고 한다. 조상들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했다. 집안에 우환이 있어도 제사를 생략했다. 전 세계가 코로나와 싸우고 있다.


엄마가 입원해 계신다. 나라 역병에 집안 우환까지 겹쳤다.

우리 집은 이번 설 차례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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