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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Mar 31. 2021

제네바에서 제네바 호수 찾기

도가도 비상도 道可道非常道

구글 지도



오래전에 차를 타고 스위스를 여행했다. 여기저기 다니다 계획에 없던 제네바 호수를 보러 가기로 했다. 여행하면서 일정을 조정하는 동기 중에 "여기까지 왔는데..."는 강력하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알프스에서 제일 크다는 제네바 호수가 지도에 없었다. 프랑스와의 국경에 Genfersee라는 이름의 큰 호수가 있을 뿐이었다. 지도에 의존해서 여행하다 길을 놓치고 일행하고 자주 싸우던 시절이다.


크고 아름다운 호수를 끼고 있는 제네바 시내를 뱅글뱅글 돌았지만 결국 제네바 호수도 Genfersee 도 못 찾고 돌아왔다.


독일에서 스위스로 이동하면서 독일어 판版 지도를 가지고 갔었다. 독일어로 제네바 호수가 Genfersee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프랑스어를 쓰는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레만 호 Lac Léman라고 부른다. 꽉 막힌 사람이 독일어 지도를 가지고 프랑스어 지역을 여행하다 생긴 일이다.





지도에는 여러 가지 버전이 있다.


제작자에 따라 지명이 다를 수 있다. 목적에 맞는 지도를 선택해야 한다.


일본 지도엔 동해가 일본해로 돼있다. 수원시에서 만든 광교산 등산 안내도엔 용인에서 올라가는 길이 안 나온다. 광교산은 수원시, 용인시, 의왕시에 걸쳐 있다.


정보는 만든 사람의 목적이나 기준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정보 생산자가 설정한 방향성을 걷어내고 바탕을 읽는 혜안이 필요하다. 임진왜란 전에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김성일과 황윤길은 각각 조정에 상반된 왜倭의 동향을 보고했다. 통수권자인 선조는 두 사신의 정치적 배경을 감안해서 진영 프레임을 의심하고 판단했어야 했다.


조직에서 부서 간에 의견이 엇갈린다고 짜증 내는 경영자나, 정치인들 보고 싸우지 말라는 유권자는 다양한 의견을 듣고 냉철하게 판단하는 고유의 의무를 회피하고 싶다는 거다.


편향된 정보에 집착해서 신념화하고 대사를 그르치는 일이 많다. 첩보와 정보를 구별하고 균형 있게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은 지도자의 핵심 덕목이다.



지도 안에 모든 게 다 있다는 맹신은, 지도 상에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오판으로 이어진다.


지도는 입체공간의 자연과 인문을 과거 시점에 기호로 압축한 문서다. 삼차원을 이차원으로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고 제작 당시와 사용 현재 사이의 변화도 반영되지 않는다. 누락이나 착오를 피할 수 없다. 


지도상의 직선거리가 실제는 곡선일 수 있고, 도로공사로 우회하는 구간도 지도에는 안 나온다. 언제, 어떤 차로, 누가 운전하냐에 따라 경로와 운행시간이 달라진다. 결국 시시각각 현실적인 선택이 필요하다. 운전하면서 내비게이션의 속도제한이 도로 표지판과 다르면 표지판이 우선이다, 당연히.


세상 살아가는 설명서는 없다. 선각자의 교훈이나 지침은 과거 경험을 추상화시킨 참고 자료에 지나지 않는다. 난립하며 서로 상충하는 데이터 중에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 딱 들어맞는 맞춤형 사례는 없다. 


답답하면 운명을 들먹인다. 사람의 운명이 미리 정해져 있다고 하는 건 지도만 믿고 길을 가겠다는 것과 같다. 고장 난 내비게이션이 우회전하란다고 청담대교 한가운데서 한강으로 떨어지는 사람은 없다. 사람의 특징은 DNA로 결정되지만 사람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여행할 때 현장에 대한 예비지식, 그리고 방향 감각이 있으면 헛걸음을 줄인다.


스위스에서 제일 큰 호수가 제네바에 있다는 상식이 있고, 내가 지금 제네바 시내에 들어왔다면, 차창 옆으로 달리는 호수가 제네바 호수라고 믿어도 된다. 직감이 자료보다 정확할 때가 많다. 지도에 이름이 뭐라고 표시되어 있던 상관없다. 호수 자체를 즐기면 된다. 호수의 브랜드를 확인하러 간 게 아니다.


나의 감각으로 지도의 방향을 동기화하고 내려다보는 여유가 있으면 지도에 기록된 문자에 끌려다니지 않는다. 내비게이션에 '부산식당'을 '부산 시청'으로 잘못 클릭하고 멍청히 따라가면 날 샌다. 부산식당은 종로 인사동에 있다.


수업 시간에 책상에서 교과서를 치우라고 한 선생님이 계셨다. 발표할 때 파워포인트 같은 프로그램을 못 쓰게 하는 회사도 있다. 상상력이 문자에 의해 산만해져 쪼그라들지 않게 하려는 배려다.


계산기 쓰면서 암산할 일이 없어지고, 스마트폰 없으면 식구 전화번호도 제대로 못 외운다. 내비게이션은 공간을 지각하는 총기를 잠재운다. 기계 문명의 진화에 반비례하여 사람의 동물적인 감각이 퇴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동양 고전에서는 우주의 근본 원리를 길을 뜻하는 도道로 상징했다.


노자의 도덕경은 도가도 비상도 道可道非常道 로 시작한다. 구절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지만 그중 하나는 '도를 도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도가 아니다'이다. 심오한 도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냐고 하면서 언어의 열등함을 깨우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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