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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Mar 09. 2021

변소 이야기들


비위가 약한 사람은 읽지 마십시오. 식사 시간을 피해서 읽으세요.


어디 가서 변소가 어디냐고 물어보면 알아듣기는 하는데 무식하거나 웃기려는 사람 정도로 여긴다. 그나마 앞으로는 못 알아들을지도 모르겠다. 변소가 화장실이 된 연유를 검색하면 대개는 '수세식이 되면서 세면대나 욕실이 같이 붙어 있어서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라고 나오는데 정확한 답은 아니다. 일본 사람들이 변소라는 직설적 표현을 피해서 만들어 낸 말이라는 게 정설이다. 변便의 우리말 풀이는 '똥이나 오줌을 점잖게 이르는 말’로 되어있다. '변소'도 또한 이미 한번 비껴간 말이다. 언제까지 똥을 피해 다닐 건가? 
지난 브런치 글 중에서



우리문화신문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 여름이면 식구와 떨어져 시골에 가서 두어 주일씩 지냈다. 할아버지가 사시는 시골집엔 뒷간이라 불리는 변소가 마당 저켠 돼지우리 옆에 있었다. 제주도 같은 방식은 아니다. 밤중에는 변소 가기가 무서워 요강을 쓰는 걸 허락받았다. 나무가 삐걱거리고 위태로웠다. 낮에 변소 갈 땐 아예 옷을 다 벗어 놓고 갔다.


시골 시냇물에서 놀다 보면 거머리한테 여기저기 물리는데 그냥 놔두면 낫는다. 하루는 고추 끝을 물려서 벌겋게 부었다. 막내 삼촌이 할아버지가 보시면 고추를 따버릴 거라고 했다. 다 나을 때까지 할아버지가 집에 안 계실 때만 변소에 갔다.






대림 세라믹

내가 처음 수세식 변소를 써 본 건 국민학교 들어갈 때쯤이었는데 그 첫 경험이 황당했다.


일요일 날 아버지를 따라 회사에 갔는데 미도파 맞은편에 있는 ( 당시 기준 ) 고층빌딩이었다. 휴일 아침 은행 사무실엔 아무도 없고 불이 꺼져 침침했다.


아버지가 복도에 있는 변소에 데려다줬다. 바닥에 붙어 있는 일본식? 변기였다. 일을 보고 나서 가르쳐준 대로 철제 레버를 밑으로 눌렀더니 변기에 물이 폭포처럼 흘러들어왔다. 잠그는 방법을 몰랐다. 레버를 위아래로 당기고 눌러도 물은 계속 흘러나왔다.


나는 도망쳐서 사무실로 아버지한테 튀어갔다. 물이 저절로 멈춘다는 걸 알기까지 1 분 정도 나 때문에 아버지 은행이 물에 잠기는 공포에 떨었다.




https://brunch.co.kr/@hhjo/22


전방에서 군대 생활할 당시 내무반(생활관) 뒤 언덕 받이에 공동 변소가 있었다. 당연히 푸세식이었지만 비가 오면 수세식으로 전환되었다.


변소 바로 옆으로 지나가는 작은 시내는 평소엔 건천인데 비가 많이 오면 폭포로 바뀌었다. 경사가 가팔라서 물줄기가 제법 세었다. 우리 부대는 비 올 때 한 번씩 내용물을 퍼서 냇물에 흘려보냈다.


여름날 비가 좀 온다 싶으면 고참이 작업을 결정하고 작업조를 편성했다. 서너 명이 한 조를 이뤄서 작업하는데 신병은 제외했다.


작업조는 속옷까지 모두 벗고 판초 우의로 갈아입은 뒤 삽을 한 자루씩 메고 언덕을 올라갔다. 공병대라 삽은 종류별로 많았다.


작업 중엔 귀한 진로 소주를 무한 리필로 제공했다. 부대가 강원도라 지역 제품인 경월 소주를 다섯 병은 사야 겨우 진로 한 병 끼어 줄 때다.


근무 시간에 주류를 지급하는 명분이 냄새를 마취시킨다는 거였지만, 사실은 맨 정신으로 수행하기 어려운 작업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형장의 망나니한테 술 멕이는 거와 같다고나 할까. 신병을 제외시키는 이유도 심리적인 충격을 우려해서였다.


냄새는 좀 있으면 감각이 없어진다. 삽 세 자루가 달아야지 제대한다는 골(공)병대에서 땅 파는 건 일상이었다. 액상과 고상의 중간 상태를 다루는 거라 맨 땅 파는 것보다 힘은 덜 드는데 생각이 복잡해졌다. 내가 어쩌다 이런 일까지 하게 되었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반항심이 생기고 아무에게나 심술을 부리고 싶어졌다. 알코올이 필요한 이유다.


훈련소에서 병사들을 울리고 싶으면, 단체로 원산폭격 ( =대가리 박아 기합)을 시켜놓고 '어머니 마음' 노래 ( 나아실 제 괴에로움...)를 부르게 하든지 / '내가 왜 이럴까, 사회에선 안 그랬는데'를 두세 번 복창시키면 된다. 처지에 대한 비관에 서러움이 복받쳐서 여기저기서 질질 짠다.


작업조는 한나절 푸고 나서 며칠간은 모든 작업과 훈련에서 열외가 된다. 이 엄청난 특전은 무엇보다 냄새가 나서 뭐를 같이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닦아도 냄새가 독해서 사흘은 간다. 몸에 두드러기가 나기도 한다. 표정도 무섭다. 주위 동료들이 와서 달래주면서 마음이 풀어졌다.


힘들고 험한 일을 하는 이들은 사회가 자기를 떠다밀었다는 반감을 가지기 쉽다. 공연히 불특정한 다수를 원망하고 심해지면 '묻지 마'로 시작하는 엽기적인 행패로 이어진다. 사회적 비용이 발생한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모두 선망하는 일과 피하고 싶어하는 일은 분명히 존재한다. 신역만 고되고 보상이 부족한 일을 하는 이들이 열패감에 들지 않게 배려하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다.


내가 했을 수도, 미래에 내가 할지도 모르는, 고단한 그 일을 대신해 준 사회의 동료를 위로해 줄 때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믿음이 실천된다. 하는 일이 험하지, 하는 사람이 험한 게 아니다. 


이 작업의 겨울 버전은 많이 달랐다. 영하 20도 밑으로 내려가는 엄동에는 목표물이 돌처럼 얼고 날카롭게 솟아 올라 사용자들을 위협했다. 수시로 철근 봉을 가지고 봉우리를 무너뜨려야 했다. 여름 수세식에 비해 작업은 간단하지만 기술이 필요했다.


배구 경기에서 스파이크를 내리꽂을 때 공격 루트를 놓치면 역공을 당한다. 나를 향해 튀어 오르는 파편은 치명적이었고 마스크는 없었다.










수년 전에 출장 온 유럽 사람이 호텔 방에 있는 변기를 사진 찍어 자기 아내한테 보내면서 자랑했다. '이게 비데라는 건데....'


격세 지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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