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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Sep 18. 2020

나는 카투사의 유배지에서 군대 생활했다

오래된 군대 썰

트럭이 101보충대의 정문을 나올 때까지도 트럭의 '승객'인 신병들은 자기들이 어디로 가는지 전혀 감을 못 잡았다.  그저 좀 전에 불러준 생소한 네 자리 부대 번호만  손에서 놓치면 안 되는 동전처럼 머릿속에 꼭 쥐고 있었다.  오래 전 얘기... 




당시 훈련소나 후반기 교육을 받은 신병들은 보충대에 와서 며칠 머물다 자대로 '팔려' 갔다. 보충대는 훈련받고 들어온 신병들을 지역의 각 부대로 '배송'하는 물류창고 역할을 했다. 의정부에 있는 101 보(충대)에 와서  대기하는 동안 주워들은 소리에 의하면, 여기서는 대개 수도권으로 가는데 드물게 재수 없으면 최전방으로도 끌려간다고 했다. 대개 신병들을  트럭에 태워 각 부대로 보내는데 트럭이 정문을 나서면서 운명이 갈렸다. 서울 쪽으로 좌회전하면 안도를 하고 북쪽으로 우회전하면 얼굴빛이 굳어졌다. 내가 탄 트럭은 십여 명을 태우고 오른쪽으로 돌았다. 그래도 조금 위쪽 동두천에 한미 연합사가 있어 아직 한 줄기 희망은 있었다. 첨에 떠날 때 제법 길었던 트럭의 행렬은 중간에  한두 대씩 빠지더니 마침내 우리 트럭만 남아서  민가도 안 보이는 먼지 나는 길을 줄기차게 북쪽으로  달렸다. 중간에 인솔자가 '친절하게도' 여기가 삼팔선이 지나가는 '삼팔교'라고 알려줬다. 옆에 있는 애가 울기 시작했다. 몇 시간 만에 도착한 부대 정문엔 백골 표시가 붙어있었다. 다 왔다고 하는데도 우리들은  오금이 저려서 차마 트럭에서 내릴 수가 없었다. 한 기간병이 오더니 달랜다, 여기서 조금 나가면 사람 사는 동네도 있으니까... 그래도 이북으로 끌려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내가 그로부터 제대할 때까지 외친 '백골' 구호가 하루에 백 번 정도, 삼 년간 십만 번은 되리라. 백골부대의 구호는 충성도 아니고 멸공도 아니고 백골이다. 


백골사단 페이스북


서울 한 번 나가려면 시외버스 타고 서너 시간은 걸리는데, 중간에 열 개도 넘는 검문소에서 헌병이  일일이 휴가'쯩'을 검사하는 통에 탈영하라고 해도 사양할 판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군대 생활의 계절은 언제나 겨울이다. 전방은 겨울에 체감온도가 영하 30도 이하로 내려가고 문고리에 손이 쩍쩍 달라붙는다. 전방은 적과 대치하는 전선이지 한랭전선이 아닌데도 왜 그렇게 추운지 지금도 이해가 안 간다. 그때 군대에서는 하루 세끼 국을  줬는데 입대하기 전엔 상상을 못했던 국거리가 들어있었다. 돼지고기, 꽁치, 닭 대가리 .. . 추운 날 돼지고기 국이 나오면 ( 먹을 때는 좋았지만 )웬수같았다.  졸병은 돼지고기 기름이 눌어붙은 플라스틱 식기 수십 개를 찬 바람 쌩쌩 부는 밖에서  닦았다, 뽀드득 소리 날 때까지  빨랫비누로.  지금도 설거지는 확실히 한다, 안 하면 안 했지. 



당시 일 년짜리 동사무소 방위하면서 집에서 출퇴근하거나, 군대 면제받은 친구들도 꽤 있었는데  제일 부러운 건 카투사에 차출된 애들이었다.  소문에 게네들은 한 끼 식사로 통닭 반 마리가 나온다는데 도저히 믿어지기가 않았다. ( 지금은 두 마리 준다고 해도 믿는다.) 그리고 외출이 자유로워 미팅도 한다는데 파트너한테 미제 화장품을 선물로 갖다 주더라 등 .... 그런 '한량한'  카투사에서 우리 부대로 전입 오는 애들이 있었다. 드물지만 한두 번 보았다. 전해들은 얘기로는, 카투사에서 문제가 생기면 '락까미 (ROK ARMY 한국군 )'로 쫓아 보내는데 기왕이면 우리 부대 같은 벽지로 보내 본때를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문제'라는 게 들어보면 동료를 도와주다 규정을 살짝 어긴 정도였다. 우리 정서로는 의리가 미군에겐 '좌천'감이로구나 생각했다. 우리 부대는 카투사에겐 유배지인 셈이었다. 따지고 보면 유배지로서 손색이 없는 조건을 갖추고는 있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도망 가래도 못 가지, 적과 대치하고 있는 변방에다, 옷을 몇 겹씩 껴입어도 빨가벗은 것 같은 추위 등등해서 함경북도의 인기 유배지 온성하고도 꿀리지 않았다.  그럼 우리는 사고 치면  어디로 가나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오긴 했지만 억울하진 않았다.  



그 당시 군대 생활이 고통스러운건 훈련보다는 짬밥(서열)이 지배하는 내무반의 규율이었다. 고참(선임병)들의 횡포에 시달리는 졸병(후임병)들의 오로지 희망은 나도 어서 고참이 되어 따라하는 거였다. 그러나  나의 선임병들은 우리들끼리 대물림하는 텃세가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현명한 판단을 했고 그 관행의 고리를 끊어 버렸다.  우리 사병들은 형제처럼 위아래 없이 서로를 감싸고 위했다.  '카투사'도 전화위복이 되어 억울한 '귀양살이'을 감동으로 마무리하고  나갔다. 우리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위아래' 가 일 년에 두 번 부부동반 '집합'하고 있다. 물론 지금은 카투사가 부럽지 않다. 



극기복례克己復禮 자기를 극복해 예로 돌아감.   논어안연(顔淵)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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