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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Apr 05. 2021

레고 설명서와 주입식 교육

 

© fran_, 출처 Unsplash



아이 어렸을 때 레고를 처음 사주면서, 조립하다가 자꾸 물어보고 귀찮게 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었다. 장난감 가지고 노는 어른도 있다는데 나는 그쪽이 아니다.


아이는 완성된 사진에서 재미있게 생긴 부분에 주목하면서 블록부터 집어 들었다. '조립 설명서'라는 게 있다는 것과 거기 있는 순서대로 하지 않으면 '일'이 안 된다는 걸 얘기해 주었다. 학교 들어가기 전이었지만 설명서에 그림도 있고 본인도 아쉬우니까 따라 했다.


그다음부터 레고를 사주면 아이는 으레 설명서부터 들여다보며 시작했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레고를 부담 없이 계속 공급했다. 아이의 질문을 차단해 놓고 좋아라 한 한심한 아버지다.


지금 와서 설명서 일변도 조립이 과연 아이에게 교육적이었는지 반성한다.


이케아 가구는 빠뜨린 부품 없이( 이거 겪어본 사람은 안다, 얼마나 뼈저린지...) 빠른 시간에 완성시키는 게 최선의 목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품 설명서대로 차근차근 따라 해야지 후회가 없다. 


레고는 '일'이 아니고 장난감이자 놀이하는 도구다. 애들은 놀이를 하면서 성장하고 발달한다. 장난감은 자발성을 키우고 창의력을 높여준다. 설명서를 들이대며 시키는 대로 하라는 건 개성을 무시한 교과서 중심의 획일적인 주입식 교육에 해당한다.


조립이 늦더라도, 조각 하나 빼먹어서 원점으로 돌아가더라도, 아이가 직관적으로 이리저리 해보면 재미도 생기고 문제 해결 능력도 기른다. 설명서를 강요하는 게 어쩌면 과정을 중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반대다. 개념과 원리를 무시하고 최단 시간 완성을 위해 한 가지 방식만 밀어붙이는 목표 지상주의에 가깝다.


레고 놀이의 목적은 조립보다는 조립 과정이다. '설명서'에만 너무 충실하면 준법정신이 투철한 시민이 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모험하고 도전하는 용기는 연약해진다. 유튜브에 넘치는 '라면 백배 맛있게 끓이기' 비법들은 라면 봉지에 인쇄된 조리방법에 저항하고 상상력을 발휘한 결과이다.


'설명서'만 따라 했다면 인류 역사에 혁명은 없었다.




'달은 자전하면서 공전한다. 그래서 지구에서는 달의 한 면만 볼 수 있다'라는 걸 국민학교(초등학교) 때 배웠다. 시험에 나올 때마다 틀린 적이 없다. 퀴즈에 나오면 누구든지 주어만 듣고도 단추를 내리치는 만인의 상식이다.


창피한 얘기지만 나는 대학에 들어간 후에 이 말의 개념을 이해하게 되었다. 한 줄만 외우면 내용을 모르더라도 대학 들어갈 때까지 문제가 없더라는 말도 된다. 대학교에서 배운 게 아니고 아르바이트로 과외 가르치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 걸 남에게 가르칠 수 없었다.


탐구력이 부족한 내게 문제가 있다는 것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결론만 알면 통과하는 주입식 교육에도 책임이 있다. 아이들에게 성급하게 지식을 던져주기 전에 그들 스스로 연구해서 결론에 도달하도록 유도하는 교육적 여유가 아쉽다.


달이 마치 실로 묶여 있는 것처럼 지구를 중심으로 빙빙 도는 현상이 바로 아이들이 꼭 알아야 하는 핵심이다. 이것만 제대로 이해하면 자전 공전 따위는 몰라도 상관없다. 어떤 아이는 '달은 공전만 하지 자전은 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나름 충분히 일리가 있지만 이제까지 내가 본 시험 기준으로는 오답이다.


아이는 미국에서 들어와 다닌 초등학교에서 영어시험을 보면 종종 틀렸다. '교실에서 뛰지 말라'를 영작하는 문제에서 왜 'jump'는 틀리고 'run'만 정답인지 이해를 못 했다. 출제 의도가 정답을 강제하는 주입식 교육의 본보기다.






(영어가 외국어인) 우리나라 사람들의 영어 대화에 'anyway (좌우지간)'가 유난히 많이 들어간다. 원어민보다 빈도수가 많다. 어떤 사안의 배경을 설명하다가 'anyway' 하고 대충 넘어가기도 한다. 상대방이 기껏 사정을 설명을 했는데도, 'anyway (됐고)' 하면서 다음 얘기로 넘어가는 건 무례한 태도다. 과정보다 결론이 중요한 우리의 조급한 정서를 보여준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 '안되면 되게 하라' 같은 표현은 과정을 무시하는 속성 방식 결과주의 주입식 교육과 상통한다. 조급한 민족성과 신속한 실천력이 오늘날 경제 발전에 동력이 되기는 했지만 이제는 과정을 돌아볼 때다.


일이 안되면 장황하게 변명을 늘어놓는 서양의 '핑계'정서는 우리가 바로잡아줘야 마땅하다. 반면에 과정을 분석해서 실패의 원인을 복기하는 습관은 우리가 보강해야 할 부분이다. 아프더라도 재발 방지 장치를 마련해야지 패자부활전에라도 나갈 수 있다.




몇 주 전에 상갓집에 가는 차 안에서 아이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열심히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옆에 있는 아버지한테 넥타이 매는 법을 한 번만 물어보면 될 텐데 유튜브 신세를 지는 걸 보고, 혹시 레고 설명서 영향이 아닐까 자책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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