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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Aug 07. 2021

꼰대가 미래의 꼰대에게

노인 차별

사람의 성별이나 인종, 종교 따위에 대한 편견에 바탕해서 불평등을 강요하거나 배척하면 차별이 된다. 당사자로서 어찌할 수 없는 특성을 이유로 집단적으로 배척한다는 점에서 노인 차별은 인종, 젠더 차별과 동일한 패턴을 보인다. / '꼰대가 꼰대에게' 중에서




© 7089643, 출처 Pixabay

경제적으로는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자부하지만 우리 사회는 세대와 문화 간 갈등의 경계가 전방위로 확대되어 왔다. 갈등은 차별로 표현되면서 성숙한 선진 사회로의 진입을 더디게 한다.


오늘날 성별과 인종, 성적 성향에 근거해 사람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일은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다. 차등해서 대우하는 차별 관행에도 서서히 제동이 걸리고 있다.


사적인 사이에도 함부로 여자라고 무시하거나 남의 종교를 비방하지 않는다. 장애인 공중 시설은 여전히 미비하지만 거리에서 장애인을 비하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언론에서는 '동성애자'라는 단어조차 입에 올리지 못할 정도로 관련 표현에 조심한다. 아직도 작업 현장에서 이주 노동자들에게 말을 쉽게 하는 경향이 있지만 앞으로 그들이 조직에서 관리자로 발탁되고 위상이 올라가면 이 문제도 많이 해소될 것 같다.


근래 국회에서 발의된 차별 금지법에 대해 논란이 있다. 성소수자, 종교, 사상에 대해 양심과 신앙에 따라 비판하는 것을 어떤 기준으로 형사 처분하느냐에 논란의 초점이 있지, 차별의 금지에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아직도 대놓고 차별하는 대상이 있는데 바로 노인 집단이다. 노인 차별은 오히려 정도가 심해지고 있다. 왜 이런 행동은 여전히 받아들여지는 걸까?




노인은 젊은이들이 많이 이용하는 카페나 커피숍에서 기피당하는 경험을 한다. 입장을 거부당하기까지 한다. 고령을 이유로 일자리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건 얘깃거리도 안된다. 만일 동성애자나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출입을 막는 업소가 있다면 사업적으로 '극단적인 선택'이 될 것이다.


노인이 교통사고를 내면 언론은 사고 운전자가 노령임을 암시해서, 노인네가 집에서 손자들이나 보지 뭐 하러 나돌아 다니나 하는 핀잔을 자극한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여자 운전자가 걸리적거리면 대번에 여편네가 집에서 밥이나 하지 하던 식이다. 노인이 교통사고를 더 낸다는 근거는 없다. 렌터카 업체가 25 세 이하 운전자에게만 할증료를 매기든지 아예 차를 안 빌려주든지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노인이 병원에 가면 나이 들어 그렇다고 싸잡아서 통 큰 진단을 내리거나, 나이 먹은 의사는 한 술 더 떠 자기도 그렇다면서 환자의 말문을 막는다. 그대로 살 다 죽으라는 말로 들린다. 의사로서 동기부여가 낮을 수밖에 없겠지만 전문가의 자세는 아니다.


정치권에서는 기득권 세력의 교체가 나이를 기준으로 하는 세대교체와 동의어가 되었고 공개적으로 꼰대는 물러가라고 주장한다. 나이가 들면 정신이 퇴락한다는 노인 폄하 망언도 서슴지 않는다.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정계 '중량급' 들이 대부분 나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나이가 후진적 정치의 핵심 원인인 양 과장하고 있다.


국가 인권위원회 법에서 규정한 차별 행위 범위에 나이가 들어가 있긴 하지만 노인 차별에 관여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 나이를 가지고 채용이나 자격시험에 불이익을 주는 경우에 위원회가 나서는 정도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높다고 하는데 그중 65세 이상 노인의 자살률은 더 높다. 사회로부터 냉대받으면서 빈곤하고 고독한 삶을 살다 자살에 이르는 것이다. 노인 차별은 노인 혐오로 시작해서 노인에 대한 정서적 신체적 학대로 연결된다.


사회적 지지와 스트레스가 우울을 경유하여 중고령자의 자살 생각에 도달하는 매개 경로의 유의 수준을 확인하였다. [사회적 지지와 스트레스가 서울시 거주 중고령자 자살 생각에 미치는 영향] / 정일영 정찬우 2015


젊은이들은 노인 하면 '냄새', '뻔뻔', '과거에 고착', '자기주장'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린다. 온라인에서도 '틀딱충'이니 '연금충'이니 하는 노인 비하 표현들이 넘쳐난다. 너희도 늙는다고 하면 자기는 아예 늙기 전에 죽어버리겠다는 '자해 협박'까지 한다.


노인 혐오의 밑바닥에는 자신의 속성에 대한 부인否認이 웅크리고 있다. 젊은 세대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성취에서 소외되는 강박이 있다. 치가 떨리도록 싫은 부모의 성격을 물려받은 걸 저주하며 부모처럼 살지 않겠다고 앙살을 부리기도 한다. 자신의 내면에 숨어있는 촌스럽고 비합리적인 속성을 의도적으로 발라내 노인 집단의 특성으로 범주화함으로써, 이질적이고, 비이성적이고, 불가해한 존재로 몰아간다. 이 경우 차별은 타자화에서 비롯한 폭력이다.


정치와 언론도 우리 사회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성별, 나이 따위로 가르고 세력화하는 데 조력했다. 주도적으로 사는 게 힘들어진 위기의 젊은 세대를 부추겨 만만한 노인을 배척과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고령화 문제의 해결, 여성 인력의 활용, 항아리 모형의 두터운 중산층으로 선진국과 중진국을 가른다고 한다.

겪어보지 않은 문제에 선제적으로 접근해서 문제의 정의를 내리고 '왜'라는 질문을 할 줄 알아야 진정한 선진국이다. 


핵심을 제대로 짚어내면 문제의 반은 풀린다. 예를 들어, 베이비 붐 세대의 노인들이 산업화 시대 경제 성장의 기초를 닦은 역군이니까 잘 돌봐 주자는 호소는 지속 가능한 문제 해결책이 안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젊음이 규범이다. 정년이 지나면 자동으로 '어르신'에 편입되어 노동시장의 외곽으로 모셔진다. 주체는 지워지고 객체로 전락하여 노후를 보낸다. 젊지 않음이 결핍과 쇠락으로 낙인찍히는 질서, 그리고 소득을 주도하지 않는 집단이 소비와 문화를 선도하는 괴리가 세대 간 반목을 조장하고 있다.


사고나 질병으로 요절하지 않으면 누구나 노인이 된다. '너도 노인이 된다'가 아니라 '누구나 노인이 된다'라는 상식을 인정하자.


가 아닌 우리 모두가 주어가 되는 문법으로 노인 문제에 접근하자.


특정 세대가 또 다른 특정 세대에 의존하는 모델이 아닌, 모든 세대가 모든 세대의 문제를 분담하는 공동체적 과제로 인식하자.


그러면 노인 혐오와 배척은 관용과 수용으로 전환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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