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 좌전 기사
기원전 500 년 경, 중국 춘추시대 노魯나라에 양호陽虎라는 인물이 있었다.
노나라 세도가의 가신이었는데 많은 재물과 인력을 모아 자신이 받들던 계손씨 가문까지 장악했다.
중원의 지배자인 주나라 왕실의 힘이 무력해지고 천자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지 오래된 때, 맹손씨孟孫氏, 숙손씨叔孫氏, 계손씨季孫氏의 삼환씨三桓氏 세도 가문이 노나라를 관리했다. 권력이 이중 삼중으로 역류하는 혼란한 시기에 양호陽虎 는, 좌전左傳에 의하면 노나라의 제후인 정공 5년부터 등판해서 애공 2년까지 활약한다.
논어論語에도 (양화陽貨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양호 관련 좌전 기사들을 요약하고 당시 상황을 추측해 보았다.
좌전: 춘추시대 사회 현실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노나라의 역사책.
노나라 정공定公 5년 BC 505
1. 계평자平子의 가신 양호陽虎는 계평자가 죽자 그 아들 환자桓子와 환자의 친척인 공부문백公父文伯을 가두고 결맹한 후 풀어주었다. 그 후 노나라의 국정을 장악한다.
2. 그에 앞서 양호는 계평자의 시신을 염하면서 보옥寶玉을 넣으려다 중량회가 반대하고 공산불뉴가 만류해서 그만둔다.
주군이 죽자마자 주군의 아들을 밀치고 나라의 주인 행세를 했다. 계손씨季孫氏의 가신 출신으로서 두 단계를 건너뛰고 참칭한 셈이다. 노나라의 국정을 독단하고 제후인 노소공魯昭公을 나라 밖으로 내쫓은 계평자에게서 보고 배운 대로 했다.
정공 6년 BC 504
1. 당시 (강대국이었던) 진晉나라의 하청을 받아 인접한 소국 정나라를 치고 돌아오는 길에, 계손씨와 맹손씨를 시켜 사전 양해도 없이 위衛나라 영토를 거쳐오게 했다. 이에 화가 난 위나라의 제후 영공靈公을, 위나라 대신들이 위-노 두 나라가 역사적으로 형제의 나라임을 강조해서 진정시킨다. 두 나라를 봉토받은 주공과 강숙은 주周 문왕 왕비 태사의 (한 배) 아들들이다.
자기 상관을 앞세워 도발을 했다. 참 못됐다. 요새는 외국 군용기가 무단으로 항공 식별구역만 침범해도 전투기를 발진시킨다. 말썽이 나야 존재감이 생기는 양호가 쌈을 걸었으나 무위로 끝났다.
2. 계환자가 정나라에서 데려온 포로들을 바치러 진나라에 갔는데, 양호는 맹의자를 따로 보낸다. 맹의자는 진나라의 실력자인 범헌자范獻子에게 양호를 부탁한다. 노나라에서 양호가 쫓겨 오면 받아달라고…….
양호의 축출을 미리 예견하고 선처를 부탁한 것이다. 양호가 시킨 건지 아니면 맹의자가 미래의 골칫거리를 처리하기 위한 조치였는지 모르지만, 이로부터 삼 년 뒤 양호는 진나라로 쫓겨가서 또 다른 실력자 조간자의 가신이 된다. 이 사람들 프로다.
3. 양호는 다시 노나라 정공, 삼환씨와 동맹을 맺고, 귀족들과 광장에서 군중대회를 연다.
어디 가나 이런 인간이 있다. 결핍과 미달을 보여주기 쇼로 모면한다. 그런데 자기 집안 가신과 동맹 맺고 끌려다니는 계씨는 무슨 약점을 잡혀서 그럴까?
정공 7년 BC 503
주변의 제나라가 노나라를 치자 양호는 계환자의 마부가 되어, 군대를 풀어 매복하고 기다렸지만 작전 실패. 읍재邑宰(고을의 수령) 공렴처부와 점이가 전쟁에 지면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양호는 겁을 먹고 돌아간다.
권력을 장악한 지 2 년 차에 내부에서 양호에 대한 저항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쟁이 터지면 내부 결속이 강화되지만, 안 되는 집은 적전敵前 분열한다. 사실 전쟁터에서는 자기편 제거하기도 쉽다.
정공 8년 BC 502
1. 제나라와 전쟁 중에 염맹이란 자가 거짓 부상당한 체하는 걸 눈치채고, 양호가 ‘염맹이 이곳에서 응하면 적을 꼭 이길 텐데.’라고 하며 전력을 다해 싸우게 만든다.
사기꾼은 사기꾼이 손본다.
2. 계환자에게 서운했던 공산불뉴, 계오 등 5명이 양호를 부추겨서 삼환씨를 암살하는 계획을 세우지만, 공렴처부가 알아채고 제거 대상 중의 하나인 맹손씨에게 알려줘서 거사가 불발된다. 양호는 제나라와 노나라의 국경으로 도망가면서 정공의 궁宮에서 보옥과 대궁大弓을 훔쳐서 가지고 갔다.
권력의 주위에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자들이 몰려들어 권력자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
그런데 제후의 보물을 가지고 도망친 건 뜨악하다. 망명 자금이 필요했던 걸까? 정치범이 잡범이 되는 순간이다. 혹시 정공 5년, 계평자 시신을 염할 때 넣으려 하다 포기한 그 보옥인가? 당시 거꾸로 염을 핑계로 보옥을 챙기려는 게 아니었을까?
정공 9년 BC 501
1. 양호가 보옥과 대궁을 돌려보냈다.
노나라 당국을 향한 화해의 손짓인가?
지금도 국가 간에 아쉬운 건이 있으면 약탈해간 문화재 같은 거 반환하고 그런다.
2. 노나라가 양호가 있는 땅 양관을 토벌했다. 양호는 제齊나라로 도망가서 노나라를 같이 공격하자고 구슬려서 제경공이 넘어갈 뻔했는데 포문자가 만류했다. 양호의 이력을 상기시키고, 우리(제나라)가 뭐가 아쉬워서 선량한 노나라를 희생시키고 양호의 권모술수에 가담해야 하느냐는 극히 상식적인 간언이었다. 제경공은 양호를 가두었는데 양호는 송나라를 거쳐 진晉나라로 도망가서 실력자인 조간자에게 의탁했다.
맹의자의 선견지명이 탁월하다.
양호가 획책했던 다수의 전쟁이 현명한 신하들의 판단으로 저지되었다.
그 후 양호의 기세가 악명이 사라지는 듯했는데….
애공 2년 BC 493
위령공이 죽자 진나라 조앙이 위나라 태자 괴외를 척 땅으로 보냈는데, 양호가 꾀를 내어 8명에게 상복을 입혀 위나라 사람으로 변장시켜 성사시켰다.
속임수의 달인….
양호와 공자는 동시대 사람이다.
돼지를 선물하면서 공자를 회유하지만 공자가 어울릴 수 있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다.
무엇보다 군군君君, 신신臣臣, 부부父父... 하는 공자의 정명正名사상과 충돌한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공자는 팔일무八佾舞처럼 주제넘은 파티를 집 마당에서 벌이며 천자 놀음하는 계씨 집안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그런 계씨 가문을 괴롭히는 양호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재미있는 건 공자와 양호가 닮았다는 사실이다. 공자는 다니면서 악명 높은 양호로 오해도 받고 위험에 빠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