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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Jan 12. 2022

친구 따라 지리산 종주하기 2

종주 대신 천왕봉만 왕복

확증편향


어지간한 준족이 아니면 지리산 종주 도중에 적어도 하룻밤은 대피소에서 묵는다. 능선에 다섯 군데 정도 있는 대피소는 코로나 이후 이 년째 문을 닫아걸고 있다. 매점은 운영하지만 숙박은 안된다. 이십 대에 처음 종주를 할 때 텐트에다 묵직한 석유 버너까지 지고 올라가서 이틀 밤인가 야영한 게 생각난다. 지금은 야영 금지.


(작년) 9월에 들어서며 백신 접종률이 올라가고 추석도 끼고 해서 코로나 분위기가 좀 좋아졌다. 명절이 지나면 대피소에서 적어도 접종자는 받아줄 거란 기대감이 생겨 종주 일정을 10월 초 연휴로 잡았다. 더 있으면 춥고 해가 짧아져 우리는 하라고 해도 못한다. 그러나 당국은 수도권 4단계 비수도권 3단계를 아예 10월 초까지 연장해서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추석 연휴 영향을 관찰하기 위해서 그런다고.


대피소가 소상공인이 운영하는 업소도 아니고, 갈 곳 없는 노숙자들의 쉼터도 아니다. 사서 고생하는 등산객들이 밀집해서 머무는 시설을 통 크게 열어주길 바라는 건 요행심이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오는데 자기 위주로 판단하다 헛물만 켰다.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무시하는 확증편향을 몸소 체험했다.


방역정책은 사회적 공감과 반감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며 2주 앞을 분간하지 못하고 있다. 집합 금지 명령의 자연 과학적 근거도 그다지 명쾌하지 않다. 인류가 과거에 경험했던 몇 차례 대유행의 모델은 오늘날 코로나에 대응할 이론체계를 세우기엔 충분하지 않다. 시장이나 지하철과 종교시설, 유흥업소, 헬스장에 대한 정책의 온도차는 과학보다는 먹고사는 문제로 설명하는 게 빠를 것 같다. 사회적 거리를 가지고 딜을 하는 노란 잠바 입은 이들에게 교회와 나이트클럽, 그리고 등산객은 만만한 거래처다.


플랜 비


세상 일 맘대로 안된다. 통찰력 있는 경영자는 사업 계획을 세울 때 차질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제2, 제3의 대안을 준비한다. 닥쳐서 허둥대다 악수惡手를 두지 않기 위해서 히든카드 한두 장은 뒷주머니에 꼽아놓고 있다.


설악산, 지리산은 시월이면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기도 한다. 종주를 더 미룰 수 없어 계획안을 타협했다. 정상인 천왕봉 당일 왕복으로 계획을 대체했다. 일정은 시월 초 연휴 그대로 하고.


천왕봉 최단 코스는 산청군 중산리에서 시작한다. 정상에서 되짚어 중산리로 원점 복귀하면 빠르지만 가파른 내리막을 피하기 위해 반대편 함양 쪽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원래 종주 첫날엔 중산리 - 천왕봉- 장터목 대피소 거쳐 세석 대피소까지 내처 가서 잠을 자는 일정이었는데 이번에는 장터목 대피소에서 우회전해서 함양 백무동으로 내려간다.


거리는 12 킬로인데 다른 사람들 기록을 보면 평균 11시간 정도 걸린다. 세석 대피소까지 가는 종주 첫날 거리보다 좀 길다. 중산리 백무동 구간이 우리가 훈련한 청계산 - 광교산 20 킬로 미터에 비해 거리는 짧지만 획득 고도와 경사도를 감안하면 난도가 높고 평균 시간도 두 시간 정도 더 걸린다. 우리가 청광 뛸 때 다른 이들 평균보다 두 시간 정도 더 걸은 걸 기억하면 이번엔 최소 13시간은 잡아야 한다는 결론이다, 악명 높은 중산리 - 천왕봉 깔딱 고개에서 퍼져버리는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펄쩍 뛰기 1


저녁 6시 반이면 해가 지니까 새벽 일찍 올라가야지 해 있어 내려온다는 계산이 나온다. 게다가 하산 지점인 백무동에서 서울 가는 버스는 오후 6시가 막차다. 5시 하산을 목표로 역산하면 중산리에서 새벽 4시 이전에는 출발해야 된다. 어두운 밤길보다 밝아오는 새벽 길이 낫다.


새벽 세시 반 출발을 일행에 제안했더니 펄쩍 뛴다. 10 시간 잡으면 아침 6시에 시작해도 오후 4시면 백무동에 떨어지니, 정리하고 버스 타는 데 문제없다는 의견들이다. 내 계산하고 네 시간이나 차이가 난다. 친구들의 자신감을 믿고 싶지만 문제는 중산리에서 올라가 본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결국 출동을 새벽 5시 반으로 당기는데 그치고 나는 은밀하게 각개전투 계획을 따로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버스 놓치면 백무동에서 자고 다음 날 돌아가도 되지만 뒤에 처져 밤중에 너덜 길을 내려가는 건 안전의 문제다. 아쉬우면 별 짓 다한다. 난생처음 달 뜨는 시간도 검색해 봤다. 새벽 2시 반에 떠서 다음 날 오후 5시경에 진단다. 그믐달이다. 새벽녘엔 달빛이 약간 있지만 저녁땐 그나마도 없다.


보통 이런 경우 수도권 사람들은 자정에 떠나는 심야버스를 타고 가서 새벽에 내려 곧바로 올라간다. 나도 전에 두 번 다 그랬다. 처음엔 야간열차 타고 구례역에 내려서 돼지 국밥 한 그릇 먹고 화엄사로 가서 산행을 시작했다. 돼지고기로도 국을 끓일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또 한 번은 밤새 대절버스 타고 와서 중산리에서 올라갔고.


이번엔 얘기가 다르다. 밤샘하고 올라갈 자신도, 필요도 없다. 하루 전에 현지에 도착해서 자고 일찍 일어나서 올라간다. 중산리 등산로 입구 바로 앞에 있는 민박을 하나 잡았다. 나는 민박하면 연상되는 단어가 효리네가 아니고 '인심'이다. 국내 여행 블로그를 보면 민박집 아주머니(=실세,주인아저씨는 대개 겉으로 돔)가 베푼 친절, 푸짐한 반찬 얘기가 많이 등장한다. (봉제사奉祭祀)접빈객接賓客 의 유교적 덕목을 아직도 실천하는 주인의 배려는 민박하는 즐거움 중의 하나다. 호텔은 별 몇 개로 대충 짐작이 되지만 민박은 안 가보고 미리 시설이나 수준을 가늠하기 어렵다. 외국 여행할 때 이용하는 에어비앤비도 마찬가지다. 이번엔 어떤 데가 걸릴까 하고 쪼는 재미는 있다.


하산 지점인 백무동에서 수도권으로 떠나는 버스는 동서울행 밖에 없다. 코로나 때문에 전국적으로 시외버스 노선이 많이 줄었다. 저녁 6시 막차를 예약했지만 제시간에 맞춰 내려올 자신이 없다. 친구들 몰래 남원 발 서울행 KTX 밤 열차를 예약해 놓았다. 밤중에 쩔둑이고 내려오면 택시 타고 가까운 도시인 남원으로 내빼서 서울행 KTX를 잡아타는 복안이다. 극성수기라서 이것도 예약을 해놔야 안심이 된다.


나중에 KTX 예약 사실을 친구들에게 공개하자 칭찬보다는 비난이 돌아왔다. 비상시 여벌로 챙긴 교통편인데 나의 몸짓은 이미 버스 놓치고 밤 기차 타고 돌아오고야 말 거라는 불행한 시나리오를 강하게 암시하고 있었나 보다, 마치 바라기라도 하듯이.


펄쩍 뛰기 2


(영혼이 젊은) 친구 ㄱ이 버너를 가지고 올라가서 정상에서 점심으로 삼겹살을 굽자고 하는데 이번엔 내가 펄쩍 뛰었다. 하루 산행 계획을 짜는데 여기저기서 펄쩍 뛴다. 안 그래도 빠듯한 산행 일정에 배낭 무게와 먹는 시간을 늘리면 독이 된다는 이유였다. 국립공원에서는 취사를 못하게 되어있지만 대피소 취사장에서는 가능하다. 점심은 장터목 대피소에서 햇반이나 빵으로 때우는 걸로 설득했다


나로선 상황을 방어적으로 판단해서 안전 위주 선택을 주장하는 거지만, 비관적인 전망으로 재수 없게 초 치는 소리만 해대면서 주위를 우울하게 만든다. 성공이나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없이 해보지도 않고 겁부터 집어먹는 걸 패배주의라고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경직된 사고에 갇혀 스스로와 주변에 스트레스를 주는 걸 경계해야 한다.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군자지어천하야 무적야 무막야 의지여비
군자는 천하의 일에 대해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도 그래서는 안되는 것도 없다. 다만 의義를 따를 뿐이다
논어 이인편


거사일


전날 도착해서 민박집에 딸린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동동주를 시켰다. 지리산 더덕으로 만들어서 그런지 향이 좋지만 나는 애써 외면한다. 6월에 종주 훈련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넉 달 술을 끊은 이유는 체력 보강과 체중 조절 두 가지다.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지만 난 전날 술을 마시고 산에 오르면 부대낀다. 덕분에 그동안 각종 무알코올 맥주를 체험함. 술을 안 마시니 체중도 4-5 킬로 빠져서 오르고 내리는데 부담이 덜했다. 일타이피라고 했던가. 내일 아침엔 해가 뜨고 저녁엔 맥주를 마신다.


주위를 산보하자는 친구들을 만류하고 일찍 자리에 들면서 중대 발표를 한다. 나는 내일 새벽 세시 반에 먼저 출발할 테니까 자네들은 예정대로 다섯 시 반에 떠나게. 저 체력 인원을 이렇게 선발대로 먼저 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달랬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 게 의리가 아니고 천왕봉을 찍고 백무동에서 다 같이 버스 막차에 올라타는 게 의리다. 친구 ㄴ이 나와 동행하겠다고 나선다. 캄캄한 새벽에 혼자 보내기가 걱정이 되었나 보다. 두 명씩 2개 조로 나누어 새벽 세시 반과 다섯 시 반에 각조 약진 앞으로.


수면 유도제를 먹고 자서 그런지 배낭이 등에 착 달라붙으며 걸음이 가볍다. 세시 반인데 벌써 탐방로 입구가 북적인다. 헤드 랜턴 켜고 1킬로 남짓 가니 칼바위가 나오고 경사가 가팔라진다. 그래도 본진보다 두 시간을 앞서 있다는 배짱이 몸과 마음에 여유를 준다. 두 시간 처진 반대 경우와는 분명히 다르리라. 


로타리 대피소에 도착해서 야외 식탁에서 아침밥으로 삼각 김밥을 먹는데 해가 뜬다. 여기부터 천왕봉까지 2 킬로, 악마의 깔딱 고개가 기다리고 있다. 그래 봐야 청계산 이수봉 서너 개 정도라고 퉁치며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다는 절 법계사의 산문을 건성으로 지나친다.


그간 훈련하면서 얻은 게 있다면 힘들수록 '전력을 다하지 않고' 80 퍼센트 정도만 쓰는 전략이다.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 깎아지른 비탈을 올라갈 때 죽을 둥 살 둥 헉헉대지 않고 속도를 늦추더라도 에너지를 조금씩 비축하면서 간다. 여차하면 몇십 계단은 뛰어 올라갈 수 있다는 준비 태세를 ( 마음속으로 만 이래도 ) 유지하면 좀 수월하다.


우리 같은 사람이 높은 산에 오를 땐 숨쉬기 바빠서 말도 제대로 안 나온다. 같이 올라가는 친구 ㄴ은 힘든 구간에서 노래를 부르는 습관이 있는데 오늘 그 소리가 유난히 크다. 천왕봉을 오르면서 찬송가를 2절까지 부를 수 있는 폐활량과 신심을 동시에 갖춘 노인은 많지 않다. 국가대표 선수 출신의 은퇴 목사라는 희귀한 조합의 친구 ㄴ은 그게 된다.


천왕봉에 도착하니 오전 8시 40분, 쉬엄쉬엄 다섯 시간 만에 올랐으니 이대로 가면 이따 버스는 탈 수 있겠다. 6월 이후 훈련 포함해서 그중에 오늘 천왕봉 오르막길이 제일 무난했던 이유는 지금까지도 잘 모른다.


듣던 대로 정상석에서 인증 사진을 찍으려고 늘어선 줄이 밑에서 올라오는 계단까지 이어진다. 정상석을 두어개 더 만들어 놓으면 어떨지.


산에 오르면 주위의 다른 산을 내 눈높이에서 온전히 바라 볼 수 있다. 지리산에서는 첩첩으로 이어진 주위 산봉우리들을 굽이굽이 감싸고 흐르는 운해를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자연은 인간에게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자기 원인적인 기쁨을 선물한다.


정상에서 한 시간 반 정도 기다려 후발 본진과 합류했다. 장터목 대피소에 예정보다 좀 일찍 도착, 점심으로 전자레인지에 돌린 햇반을 비벼 먹고 본격적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끝이 안 보이는 백무동 너덜 길은 오르막보다 더 힘든다. 산행할 때 정상을 넘어서면 긴장이 풀리면서 지루해진다. 백두대간 육십령- 황점 구간에서 정점인 서봉을 지난 후 4-5 킬로는 더 가야지 삿갓 재 대피소가 나오는데, 서봉 지나자마자 삿갓재를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정상을 찍었는데 감히 내려가는 길 따위가 걸리적거리냐 하는 조급한 심보로 덤비면 하산길은 점점 더 멀어지고 지친다. 그리고 위험하다.


선두를 맡은 친구ㄷ은 후발 조로 올라왔지만 점심 먹고 내려가면서 이미 시야에서 벗어났다. 다리에 힘이 빠지고 무릎은 따로 놀지만 백무동 카페에서 생맥주 500cc 곱빼기를 나의 건조한 혈관에 때려 넣는 상상으로 버틴다. 나는 동기가 유치할수록 성취 확률이 높다.


하산 종점에 있는 카페에 오후 4시 좀 넘어서 도착하니 친구 ㄷ은 이미 말끔하게 옷을 갈아입고 기다리고 있다. 


ㄷ은 장담했던 산행시간 10시간을 실증이라도 하듯이 구간별 랩타임을 확인해 가며 그예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무서운 책임감이 아니면 체력, 아니면 둘 다? 나는 12시간 50분 ( 정상에서 후발 본진 기다린 시간 포함). 선방했다, 무엇보다 안전하게.


카페에서 온수로 샤워까지 하는 호강에 감사하며 버스에 올라 KTX 예약을 취소했다. 하루 산행에 여러 번 서로를 펄쩍 뛰게 했던 나의 늙은 친구들, 다음에 혹시 다시 온다면 삼겹살은 굳이 반대 안 해도 세시 반 출발은 양보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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