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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Jun 21. 2022

제천 배론 성지

황사영의 백서 

배론 성지 / 구글 어스


충청북도의 북쪽 끝에 붙어있는 제천시 봉양읍은 강원도와 맞닿아있다. 읍에서 북서쪽으로 5k 킬로 정도 골짜기로 들어가면 치악산 기슭에 자리 잡은 배론 천주교 성지가 나온다. 1800년 경 나라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 교인들이 심산유곡으로 흩어져 숨어들었는데 배론이 그중 한 군데다. 지형이 배 모양으로 생겨서 배론이라고 불렀다는데 구글 어스로 검색해 보니 실제로 길쭉한 배 모양이다. 해발 300 미터.



제천 배론 성지


우리나라의 천주교 성지는 대개 순교 터, 순교자 묘 또는 교우촌 등 조선 말기 순교자들의 행적을 보존하고 있는 독특한 문화유산이다. 지금은 자동차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경승지들이 대부분이지만 당시 교우촌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신자들이 관에 쫓겨 마지막으로 은둔했던 처절한 생사의 현장이었다.


배론 성지엔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당 터와 한국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묘가 있다. 그리고 백서로 유명한 황사영 토굴이 신학당 터 뒤에 복원되어 있다. 




정조가 죽고 11세의 어린 순조가 왕위를 이어받자 영조의 계비이자 왕의 증조할머니인 정순왕후의 섭정이 시작되었다. 천주교에 대해 소극적인 단속으로 일관했던 선왕 정조와 달리 정순왕후는 (노론) 벽파를 등에 업고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다. 조상의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를 불태운다는 이유로 천주교를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멸륜지교(滅倫之敎)로 몰아 천주교 신자 400여 명을 죽이거나 유배 보냈다. 순조 원년인 1801 년 최초의 외국인 신부인 중국인 주문모와 정약용의 형인 약종, 이가환 등도 그때 처형당했는데 신유박해라고 부른다. 1866년 병인박해까지 이어진 4대 박해의 시작이었다.


황사영은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사위다. 16세 때 과거에 급제했는데 정조가 불러서 '나이가 차면 (20세) 관직을 주겠다'라고 약속했을 만큼 전도가 양양한 수재였다. 처삼촌인 정약종(정약용의 형)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교해서 주문모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은 황사영 알렉시오는 이승훈(조선 최초 영세) 한테 천주교 서적을 얻어 스스로 교리를 익혔다. 그는 도탄에 빠진 이 나라를 건질 수 있는 길은 천주교를 신앙하여 혁신시키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전교에 힘썼다.



배론 성지 내 황사영 토굴 / 토굴 내부와 백서 사본



신유박해 때 주문모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들은 황사영은 충청북도 제천 배론 골짜기의 토굴에 들어가 8개월간 은거하며 천주교 박해의 전말을 외국에 알리기 위한 장문의 편지를 작성한다. 황사영의 백서帛書라 불리는 흰색 비단(명주천)에 써 내려간 13,311자의 유명한 편지는 당시 북경의 교구장이었던 구베아 (Alexandre de Gouvea) 주교에게 전달되기도 전에 중도에 발각되고 만다.


이미 신유박해 때 각각 경상도 장기현(포항)과 전라도 신지도 (완도군)로 유배 가있었던 정약용, 정약전 형제는 조카사위인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전라도 강진과 흑산도로 이배移配 당한다. 정약전, 약용 형제의 천주교 미사 참례 사실을 입증하지는 못했지만 백서에 이미 순교한 이가환(정 씨 집안과 사돈)과 함께 정약용의 이름이 거론되어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李家煥文章盖世 丁若鏞才機過人 乙卯以前 先王寵任之
이가환은 문장이 세상에서 으뜸이고 정약용은 을묘년 이전까지는 선왕(정조 왕)이 총애, 신임했으나...

황사영 백서


조선의 천주교 신자 박해 사실을 요약하고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교회를 재건하고 신앙의 자유를 찾게 해 달라는 호소가 백서의 핵심 내용이었다. 특히 조선을 청나라에 편입시키는 종주권을 발동하고, 서양의 군대를 출병시켜 박해를 종식시켜달라는 부분은 당시 조정을 경악시켰다.


조선말 치명한 순교자 중 상당수가 이미 시성 되어 성인의 반열에 올랐지만 초기 카톨릭의 중추적 역할을 하다 극형을 당한 황사영 알렉시오가 이제서야 시복이 추진되는 이유는 백서 내용 중 일부에 대한 매국 논란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예를 들면 백서에서 요청한 몇 줄의 대안은 관점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다.


現今國勢危 決難久支 若爲內服
지금 나라의 형세가 위급하여 결코 오래 지탱하기 어려우니 만약 중국에 편입되어 속국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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得海舶數百 精兵五六萬 多載大砲等利害之兵器 兼帶能文解事之中士三四人
군함 수백 척과 정병 5, 6만을 얻어 대포 등 다량의 무기를 많이 싣고, 글과 사리에 밝은 중국 선비 서너 명을 데리고...

황사영 백서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국제사회에 고발한 신심과 충정을 찬양하는 반면,


청나라의 속국과 서양 군대의 동원을 자청하고 간청한 백서의 외세 의존적 부분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공존한다.


그러나 피비린내 진동하는 암흑과 고립 속에서 신앙을 지킨 한 젊은이의 신념을 매국으로 몰고 가거나 민족적 배신과 결부시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매국은 거래의 일종이며 거래는 사익을 목적으로 한다. 황사영은 나라와 맞바꾸어 개인의 영달을 추구한 게 아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았다. 신앙이 구국이었다, 적어도 황사영에게는.  


당시 연경( 지금의 북경)에 자리 잡은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교리에 타협이 없기로 유명했다. 조선에서 두 번째로 영세를 받은 윤유일이 조상 제사에 대해서 물으니 단호하게 제사를 지내는 건 교리에 위배된다고 했다.

소설 목민심서


문제의 천주교 조상 제사 금지 원칙이 천주교 박해를 촉발시켰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황사영의 백서를 극단적인 포교 방식이 자초한 '사건'이라고 비난하는 입장과 궤를 같이 한다.


당시 노론 벽파가 주도한 종교 탄압은 정적政敵인 남인을 붕괴시키기 위한 명분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세도 정권을 수립하는데 장애가 되는 남인들을 천주교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하고 살륙했다.


이미 18세기 초부터 주자학 일변도의 이념 독재를 비판하고 실사구시의 학문을 추구하는 진보적 사상이 일부 지식인 (성호 이익 같은 이) 사이에 싹트고 있었다. 성리학적 통치 이데올로기의 한계성을 깨닫고, 부패하고 무기력한 봉건 지배체제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수구 정치권력을 자극한 건 당연하다.


조선의 초기 천주교 또한 서학西學이라는 사상과 문물의 일부로서 지식 계층에 의해 수용되었고 이어서 중인과 평민 집단으로 퍼져나갔다. 기존의 통념과 새로 전래한 종교 간의 문화적 갈등이 정치적 동기 없이 피바람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성리학과 충돌하는 카톨릭 교리가 마침 순조 등극을 계기로 정권의 장악을 획책한 벽파 세력에게 반대파를 압살 하는 빌미를 주었을 뿐이다.


천주교가 전통에 어긋나는 융통성 없는 교리로 박해를 자초했다는 책임론이나, 지배 권력과 함께 싸잡아 비난하는 양비론은 오늘날의 배타적 종교 분쟁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위험한 논리라고 생각한다.






황사영 알렉시오는 붙잡혀 서소문 밖에서 치명하기까지 독실한 신앙을 이어갔다. 서슬 퍼런 형조의 신문訊問에서도 한치의 굽힘 없이 '백 번 생각해 보아도 결단코 천주교는 구세의 양약이라고 생각되어 성심으로 신앙하였다.'라고 답했다.


황사영은 역모를 꾀한 대역 죄인이 되어 팔다리와 어깨, 가슴 등을 잘라내고 마지막에 심장을 찌르고 목을 베어 죽이는 능지처참의 극형에 처해졌다. 1801년 11월, 27세의 나이였다.


백서 원본은 현재 바티칸 교황청에 소장되어 있다.


주님, 황사영 알렉시오의 영혼을 돌보소서.



배론 성지 



참고한 자료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위키백과

소설 목민심서 / 황인경

배론성지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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