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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Aug 01. 2022

[고흥] 꼬막 태생의 비밀

고흥高興에서 만난 사람들


보성군청


"득량만에서 나는 수산물을 대한민국에서 제일로 쳐주지. 흘러 들어가는 강이 없어서 바다가 청정하거든."

은퇴 후 전남 고흥으로 낙향한 선배와 득량만이 내다보이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에서 소록도 병원장 조백헌 대령이 환자들을 동원해서 매립하던 그 득량만이다. 고흥반도의 서쪽 바다.


"득량만에서 뭐가 나는데요?"

'대한민국에서 제일...'로 거창하게 시작하는 최상급 주장을 들을 때마다 왠지 의심이 가고 검증 의욕이 생긴다.


" 키조개도 있고, 꼬막..."


내가 선배의 말을 끊었다.

"형, 꼬막은 벌교 아녜요? "


선배가 기다렸다는 듯이 야단친다.

"그게 잘 못 안 거제. 다 고흥에서 간 거여. 득량만 갯벌이 전부 꼬막 밭인디... 그라고 벌교엔 갯벌도 읍써.'


조정래 작가가 '태백산맥'에서 벌교의 음식문화를 소개하면서 꼬막을 하도 생생하게 묘사해 놓는 바람에 꼬막이 벌교의 명물로 알려졌다고 한다. 벌교는 발 빠르게 이미 2008 년에 '보성벌교꼬막'으로 해양수산부에 지리적 표시를 등록해버렸다. 수산물로는 1호라고 한다. 벌교꼬막이 브랜드가 되었다.


"지리적표시"란 농수산물 또는 농수산가공품의 명성·품질, 그 밖의 특징이 본질적으로 특정 지역의 지리적 특성에 기인하는 경우 해당 농수산물 또는 농수산가공품이 그 특정 지역에서 생산·제조 및 가공되었음을 나타내는 표시를 말한다.
농수산물 품질관리법 제2조제1항제8호


선배의 고흥 찬양은 계속된다.


"고흥은 이미 예견된 지명이야."


무슨 말인지 안다. 고흥高興을 한자로 풀면 '높을 고高 일어날 흥興' 이 되니 고흥 외나로도에 있는 우주센터를 이미 천 년 전에 내다봤다는 말이다. 고흥 지명은 고려 충렬왕 때부터 사용했다고 한다.


조금 뻥이 섞이긴 했어도 선배는 고향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고향 자랑보다는 고향을 아끼는 애향심에 가깝다. 나는 고향에 대해 저렇게 자부심을 가져 본 적이 있든가. 태어난 동네가 그저 그래서 그럴까.


선배는 그날 오후 시간을 비워놓고 나를 위해 고흥의 가이드 역할을 자처했고 그다음 날 다시 저녁 자리에 나를 불렀다.


과거 외국에 살 때 선배로부터 자주 도움을 받았는데 오늘도 민폐를 끼치고 있다.

살면서 주고받는 기브 앤드 테이크 give & take의 균형이 한쪽으로 쏠리는 인간관계가 더러 있다.


로빈 라이트가 감독으로 선보인 영화 랜드 Land의 대사가 생각났다.


Miguel : Here you are, take, take, take
Edee : Yeah, that's me, and you give, give, give
영화 랜드Land (2021) 중에서


벌교읍, 고흥반도/ 네이버 지도


맛집끼리만 원조 갖고 다투는 게 아니다. 지자체 사이에 갈등하는 사례가 종종 있다.


충주 다목적 댐을 건설하면서 생긴 인공 호수 충주호를 제천시는 청풍호라고 우긴다. 방어하는 충주시는 느긋하다. 전남 장성군과 강릉시 사이의 홍길동 상표권 분쟁은 재판까지 갔다. 실존 인물 홍길동이 장성군에서 출생했다는 고증을,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의 고향이 강릉이라는 사실을 각각 들고 나와 홍길동에 대한 연고를 주장했는데 장성군이 승소했다고 한다.


충주호나 홍길동 분쟁은 지자체 당국 간의 자존심 대결의 성격이 크지만 꼬막 생산지 논란은 주민들 생계에 연결되는 좀 더 현실적인 문제다. 천혜의 리아스식 해안에서 나는 풍성한 해산물은 고흥 주민들의 주요 소득원이다.




지도에서 보니까 벌교에도 갯벌은 있다. 다만 벌교 해안의 길이는 여자만의 장도를 합해도 고흥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짧다. 고흥은 군郡이고, 벌교는 보성군에 속한 읍邑이다. 행정 구역 족보로 따지자면 벌교는 고흥보다 항렬이 하나 아래인 조카 뻘이 된다.


벌교 사람들은 여자만汝自灣에 연한 벌교엔 자연 하천과 갯벌이 이상적으로 이어져서 꼬막 서식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강조한다. 고흥 쪽 해변이나 득량만 일대에서도 꼬막은 나지만 그 맛이 벌교 꼬막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 그런데 여자만은 고흥반도와 여수 사이의 바다로서 벌교 갯벌은 그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갯벌의 환경이 행정구역에 따라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예를 들어 벌교읍과 해안선을 따라 바로 이웃하고 있는 고흥군 동강면의 꼬막이 달라봐야 얼마나 다를까.


인터넷에서 꼬막을 검색하면 죄다 벌교꼬막이다. '고흥 꼬막'을 치면 '고흥 놀러 갔다가 벌교꼬막 정식 먹기'가 뜬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꼬막의 60%가 고흥산이라던데 다 어디로 갔나. 고흥에서 생산한 꼬막이 벌교로 가서 벌교꼬막으로 포장-유통된다는 것이 합리적인 추측이다. 지형으로 봐도 벌교읍은 고흥반도에서 육지로 나가는 길목에 버티고 있다. 천안 호두과자에 미국산 호도를 쓰는 것과도 다른 문제다.


제조업체가 직접 생산하지 않고 위탁 생산하는 방식을 오이엠OEM, 즉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이라고 부른다. 애플은 자체 생산 시설이 없다. 아이폰을 하청 업체인 대만 폭스콘사의 중국 공장에서 위탁 생산한다. 꼬막을 아이폰이라고 치면 벌교가 애플이 되고, 고흥은 폭스콘사의 중국 공장인 셈이다. 다른 점은 애플이 아이폰을 설계한 반면에 꼬막은 벌교가 아니고 조물주가 설계했다는 점이다. 아이폰에 폭스콘 이름이 없는 것처럼 꼬막에도 고흥 지명이 안 들어간다.


우리나라 기업의 기술력과 브랜드 인지도가 낮았던 개도국 시절엔 미국이나 유럽 업체로부터 받은 주문을 오이엠 방식으로 생산해서 선적했다. 바이어의 설계도대로 만들어서 바이어의 상표를 붙여 수출한 것이다. 심지어 '너네는 부품 하나도 제대로 못 사냐'하는 핀잔을 들으며 일부 부품을 주문자로부터 공급받아 조립해서 출하하는 사업적인 수모도 겪었다. 우리 기업이 제공하는 건 조립시설과 값싼 노동력뿐. OEM 방식은 기술 개발 투자나 마케팅 비용 없이 생산에만 신경 쓰면 되지만 주문자에 휘둘려서 채산성이 낮고 시장 경쟁력이 취약해 기업 성장에 한계가 있다. 좋은 물건을 싸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도 결국 주문자인 왕서방만 수지맞는다.


우리 기업들은 OEM 방식에 안주하지 않고, 생산을 통해 기술을 배워서 자체 개발한 제품에 주문자의 상표를 붙여 수출하는 제조자 설계 생산 방식인 ODM으로 발전했다. 나아가 마케팅 역량을 키워서 자체 브랜드 제품을 글로벌 시장에 독자적으로 유통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우리나라 기업의 글로벌 브랜드는 대개 이런 과정을 거치며 컸다. 이제는 우리 기업이 주문자가 되어 해외에 위탁 생산한다. 꼬막 이야기하다 너무 나갔다.




고흥 산 꼬막은 ODM 위탁 생산 방식과 유사하게 벌교 채널을 거쳐 유통된다고 볼 수 있다.


고흥은 현 유통 방식을 유지할 수도 있고 다른 도전을 선택할 수도 있다.


1. 현실 안주 : 골치 아픈 유통이나 마케팅은 벌교에 맡기고 고흥은 지금처럼 벌교의 꼬막 식민지로 남는다. 맘은 편하지만 거시기 좀 걸쩍지근하긴 하다. 손자가 왜 '벌교꼬막'이냐고 따져 물으면 '벌교는 꼬마'라고 아재 개그를 치든지, 네 애비는 오늘 왜 이렇게 늦냐고 딴전 피운다.


2. 타협 : 벌교꼬막의 위상은 인정하지만 고흥도 주 생산자로서 일정 부분 지분을 요구한다. '보성벌교꼬막'으로 등록된 지리적 표시에서 보성을 고흥으로 대체시켜 '고흥벌교꼬막'으로 변경하는 안을 제시한다. 기득권자인 대한민국 꼬막 챔피언 벌교가 동의할 가능성은 낮다. 고흥은 마케팅 비용을 분담해 주는 당근과 꼬막 물량을 감축하는 채찍으로 벌교와 담판을 벌인다. 중국산 꼬막 유입에 공동 대응하자는 명분도 내세운다. 들어줄 때까지 공급을 중단하는 특단의 실력행사에 들어갔는데도 얘기가 안 통하면 3번 선택으로 돌입한다.


3. 독립선언: 지금부터라도 '고흥 꼬막'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면서 물량을 시장에 직접 뿌린다. 출혈 없이 독립을 쟁취할 수는 없다. 브랜드 인지도가 낮아서 초기 판매는 저조할 것이다. 그렇다고 저가 정책을 써서 고흥 꼬막을 싸구려 브랜드로 만드는 자해행위는 삼가야 한다. 한편 벌교로 꼬막을 밀반출하는 배신행위도 단속한다. 사극 영화 제작을 후원해서 극 중 연산군이 수라상에 고흥 꼬막이 안 올랐다고 상을 뒤엎는 말도 안 되는 피피엘도 불사하고, '꼬막, 태생의 비밀' 따위의 유치한 언론 플레이도 섭외한다. 꼬막 블라인드 테이스팅 같은 행사를 통해 맛으로 승부하는 한편, 고흥의 강점인 물량 공세를 병행한다. 꼬막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꼬막 귀어 장려 캠페인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니 동시에 마케팅 효과도 있다. CNN이 고흥의 꼬막 체험 갯벌을 아시아 10대 관광 명소로 선정한다. 10 Most Visited Tourist Attractions in Asia.





여름 철엔 엉뚱한 이야기 횡설수설 늘어놓고 나서 더위 먹었다고 둘러대면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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