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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Sep 02. 2022

정약전·약용 형제의 유배지 1

전라남도 강진, 흑산도 

나주시 대호동

19 세기가 시작하는 1801년 음력 11월 나주의 북쪽에 위치한 밤남정 주막. 정약용이 둘째 형 손암 정약전과 하룻밤을 지낸 후 유배지인 흑산도와 강진으로 헤어지면서 서글픈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형제가 죽을 때까지 끝내 다시 만나지 못한다는 운명을 예감했는지 정약용은 이곳을 떠나면서 밤남정 주막집의 이별(栗亭別)이라는 제목으로 한 편의 시를 지었다. 


주막 초가 새벽 등불 푸르스름 꺼지려는데/일어나 샛별 보니 이별할 일 참담해라/두 눈만 말똥말똥 둘이 다 할 말 잃어/애써 목청 다듬으나 오열이 터지네/흑산도 아득한 곳 바다와 하늘뿐인데/그대는 어찌하여 그 속으로 가시나요
 
율정곡 / 정약용


밤남정 터로 검색한 나주시 대호동 447-2번지를 찍고 가보니 갈림길이 나오기는 하는데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요즘 지자체가 이런 관광 꺼리를 방치할 리가 없는데... 하며 정약용의 유배 길을 따라 강진으로 향했다.


다산의 학문을 이해해 주고 도움을 줬던 사람이 형 정약전이었다. 다산은 강진에 가서도 어려운 글이나 경전을 해석할 때는 서신을 통해 약전과 함께 깊게 토론했고 책자를 만들기 전에 먼저 인편으로 흑산도의 형 약전에게 보내 교정을 볼 정도로 형제애가 돈독했다.


정조가 죽고 11살의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천주교 탄압에 들어갔다. 1801 년 초 신유박해 때 약용의 셋째 형 약종과 가족들은 죽음을 맞게 되고 약용은 경북 포항의 장기長鬐 로 유배를 당하게 된다. 장기에서 적응할 즈음 조카사위 황사영의 백서 사건이 터져 약용은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11월 초 사흘간 국문에서 황사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이 밝혀져 작은 형 약전과 약용은 죽음을 면했으나 다시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다산 정약용은 1762년에 경기도 광주 마재 마을(지금 남양주시 조안)에서 태어났다. 그를 총애한 정조보다 10살이 어리다.


아버지 정재원은 첫째 부인과 사별하고 둘째 부인 해남 윤 씨와 사이에 약전, 약종, 약용 3형제와 딸을 두었다. 첫째 부인의 소생이 큰 아들 약현인데 사위가 바로 황사영이다.


https://brunch.co.kr/@hhjo/213

제천 배론 성지  |  황사영의 백서          


몰락한 남인 가문인 정약용 집안의 천주교 혼맥은 화려하다. 누나는 조선 최초의 천주교인인 이승훈에게 시집을 갔다. 정약용은 맏형 약현의 처남이자 조선 천주교회를 창설한 주역인 이벽을 통해 처음으로 서학을 접했다. 순교 성인 정하상이 조카며, 황사영은 조카사위다.


정약용의 천주교에 대한 태도는 자신의 정치적 진로에 커다란 장애로 작용하였다. 그의 천주교 신앙 여부가 공식적으로 문제시된 것은 1791년의 일이다. 이후 그는 천주교 신앙과 관련된 혐의로 여러 차례 시달림을 당해야 했고, 그때마다 자신이 천주교와 무관함을 변호하였다. 과연 이후에 정약용이 배교자로 남았는지 아니면 회개하고 천주교로 원복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조선에 입국해서 21년 동안 복음을 전파하다 순교한 다블뤼 주교의 수기 일부를 소개한다.


다블뤼 주교의 수기 - 조선 순교사 비망기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조선 천주교의 기원과 관련된 대부분의 사史실은 앞으로 자주 언급하게 될 정약용에 의해 수집된 것이다. 그의 세례명은 요한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거의 모든 천주교 사건에 참여하였다. 천주교의 주요 지도자들은 다 그의 친척이거나 친구였다. 학문과 관직으로 이름이 높았던 그는 배교하는 나약함을 보였으나 1801년의 유배를 면하지는 못하였다. 여러 해가 지나 유배에서 풀려난 그는 열심히 천주교를 신봉하고 신심과 큰 극기의 모든 실천에 장기간 전념하였으며 아주 신자답게 사망했다.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 / 정민


조선의 초기 천주교는 서학西學이라는 사상의 일부로서 식자층에 의해 학문적 호기심으로 수용되었고 이어서 종교로서 중인과 평민 집단으로 퍼져나갔다. 신 앞에 모두 평등하다는 기독교 교리가 지배층의 통치 철학인 성리학적 가치체계에 대한 본격적인 도전으로 인식되면서 집권 세력으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기존의 통념과 새로 전래한 종교 간의 문화적 갈등이 정치적 동기 없이 피바람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천주교에서 제사를 부정하는 등 탄압의 단초를 제공하기는 했지만, 정조 사후 노론 벽파가 주도한 신유박해는 정적政敵인 남인을 붕괴시키기 위한 명분이었다. 


노론은 세도 정권을 수립하는데 장애가 되는 남인들을 천주교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하고 살륙했다. 천주교와 서학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학문, 신앙 등에 대한 개인의 자유가 국가, 민족 등 전체 조직의 질서와 어떻게 충돌했는지를 이 사건은 잘 보여준다.


조선은 끝까지 신분제를 유지하면서 수직적인 수탈 구조로 간 반면, 당시 일본은 중앙의 쇼군과 지방의 다이묘 사이에 힘의 균형이 형성되면서 (결과적으로) 중앙과 지방의 문화교류가 활발해져 특색 있는 지방 문화가 대두되었다. 주자학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문화 활동의 주체가 하층에 속하는 조닌町人 신분까지 확대되고 신분 차별 없는 보편적인 교육이 이루어졌다. 위축되었던 상업이 당당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산업 근대화의 토대를 마련했다


다산이 강진 유배길에 형리에게 한 말 : 조선은 군주제여서 모든 권력이 왕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으니 잘못하면 관리들이 무능해지고 부패해지기 쉽다. 허나 일본은 지방마다 다이묘라는 권력자가 자기 땅을 다스린다네. 이 다이묘가 백성들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에 감히 노략질이나 토색질이 불가하고, 각 지방마다 특색 있게 문화가 발달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있다네.

소설 목민심서/황인경


누누이 주장해 왔다시피 나는 과거 제도 폐지론자네. 구체적인 형태도 없고 이름도 없고 실체도 없는 학문으로 사람의 우열을 가리고 등용하니 제대로 될 리가 없네. 도대체 주자학에는 경세 經世의 이론이 없네. 설사 과거에 등과 하더라도 치자治者로서의 능력이 없어 지방 관속에게 의지하기 급하니 그런 정치가 좋은 결과를 맺을 리 없다네. 왜倭만 해도 과거제도가 없네.

소설 목민심서/황인경


조선은 정약용 같이 총명한 진보 학자를 중국이나 일본에 보내 서양의 지식과 문화, 과학기술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기는커녕 이리저리 유배지로 내몰며 개혁의 싹을 잘라버렸다. 다산은 그의 보석 같은 개혁 사상을 고작 길거리에서 형리刑吏에게나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때는 조선 순조 원년.


정치 논리에 과학 기술이 매몰되는 현상은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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