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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Sep 06. 2022

정약전·약용 형제의 유배지 2

전라남도 강진, 흑산도

강진 사의재


나주시 대호동 율정 교차로 (밤남정 터)에서 남쪽으로 한 시간 정도 차를 타고 내려가면 사의재에 도착한다. 사의재는 정약용이 강진 땅에서 유배 생활을 시작한 주막집의 이름이다. 2007년 강진군에서 복원한 작은 주막이 실제로 영업 중인데 평일이라 그런지 영화 세트처럼 졸리고 어색하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의 영랑 김윤식 생가 근처에 있다.


강진군은 강진만 바다를 사이에 두고 '시옷' 자로 갈라진 모양이다. 사의재는 북쪽 꼭지 부분에 위치하고, 정약용이 나중에 옮겨간 다산 초당은 아래쪽 강진만의 왼쪽에 붙어있다.


죄인이 내려왔다고 해서 모두 기피하는 정약용에게 주막집 주인은 방 한 칸을 내주고 4년 동안이나 거두었다. 정약용에게는 절망의 끝자락에서 만난 한 줄기 희망이었다. 그는 거처하던 방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이름을 붙였다. 생각· 용모·말·행동 네 가지를 마땅하게 하는 서재라는 뜻인데 뜻과 사업이 무너진 것을 서글퍼하면서 스스로 반성하는 마음으로 지었다고 한다.


... 思宜澹 其有不澹 尙亟澄之.....
생각은 담백해야 하니 담백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빨리 맑게 해야 한다. 용모는 엄숙해야 하니 엄숙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빨리 단정히 해야 한다. 언어는 과묵하게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하니 함부로 말하는 것이 있다면 빨리 단정히 해야 한다. 행동은 신중해야 하니 신중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빨리 천천히 해야 한다.

사의재기四宜齋記 / 다산



주역사전

사의재기四宜齋記의 마지막에 '사실상 갑자년이 시작하는 동짓날 나는 주역周易의 건괘乾卦를 읽었다.'라는 멋있는 대목이 나온다. 갑자년이 1804년이니 1803년 동짓날 주역을 읽었다는 얘기가 된다.


동지는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고 음기가 극성한 한편 양기가 새로 돋는, 한 해의 과학적 시발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건괘乾卦는 주역 64괘의 으뜸이 되는 괘로서 6개의 효爻가 모두 양陽이다. 새해를 맞이하는 다산의 굳건한 각오를 짐작게 한다. 올해 동짓날에는 나도 한 번 흉내 내볼까.


다산은 강진에 도착한 지 2년째 되는 1803 계해년, 늦봄부터 동짓날 전까지 주역에만 몰두하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역학관易學觀을 성립했다고 한다. 


이듬해 1804년 다산은 주역을 해석한 주역사전의 초안(갑자본)을 흑산도에 있는 형 약전에게 보내 자문을 받았고 매년 을축본과 병인본 등으로 보완한 끝에 마침내 1808년에 완성했다.


다산은 강진에서 유배 중에 500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는데 그중에 (목민심서가 아니라) 주역사전周易四箋을 스스로 최대의 역작으로 여겼다.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주역사전을 하늘의 도움을 얻어서 쓴 글 (天助之文字)이라고까지 자찬했다.


주역이 흔히 길흉화복을 내다보는 점서占書로 알려져 있으나 많은 학자들은 삶의 실용적인 지침서로 주역을 연구했다. 전자를 상수역, 후자를 의리역(義理 : 조폭 그런 거 아니고 사람으로서 행해야 할 옳은 길)으로 가르는데 왕필, 정이천 같은 이들이 의리역의 대표적인 유학자들이다.


주역周易은 동양에서 가장 오래되고 동시에 가장 난해한 경전이다. 64 형태의 괘가 있고 각 괘는 여섯 개 막대 (효)의 조합이다. 괘는 의미를 간이화하고 형상화해서 인식하게 하는 일종의 기호라고 할 수 있다.


26번째 산천대축 괘

그러나 괘(막대의 묶음)와 효(막대)가 상징하는 바(象)를 말로 풀어놓은 괘사卦辭와 효사의 관계가 명쾌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괘사와 효사가 따로 놀거나 상충하고 아리송해진다. 


의리역의 거장인 왕필, 정이천 그리고 주희의 해석이 각기 다른 괘·효사가 적지 않아 공부하는 이들을 괴롭힌다. 수천 년간 전해 내려오며 텍스트에 오탈자도 생기고 당시 생활상을 모르면 이해가 안 가는 부분도 있기는 하다.


연구자들은 괘를 이리저리 조작하는 호체, 변괘 따위 기법을 시도해서 난해한 부분을 깨쳐보려 했지만 결과가 시원치 않았다. 


의리역의 창시자인 왕필은 이런 주역 괘상의 번잡한 독해 방식을 배척하고 유명한 '득의망상得意忘象'을 주장했다. ( 득의망상 : 삶의 의미를 파악했다면 괘가 나타내는 상징은 잊어버려라.) 조선의 유학자들도 주역 해석에서 상象을 무시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상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하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복잡하기도 했지만 결과에 대한 만족도가 낮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약용은 왕필 같은 의리역 학자의 주장을 비판하며 새로운 체계를 도입해서 주역의 괘와 효를 재해석했는데 이것이 주역사전四箋의 핵심 내용이다. 추이(推移)·물상(物象)·호체(互體)·효변(爻變) 등 네 가지 원칙을 적용하여 기호 메시지의 퍼즐을 맞추고 이론적으로 논증했다. 치밀한 학구파가 아니면 불가능한 고찰이다.


이미 상징성을 띠게 된 기호 메시지는 문자의 발명만큼이나 인류 역사상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또 하나의 문자 역할을 한다.

예술작품과 달리 기호에 대한 지식의 내용에 따라 일정한 해석이 이루어진다.

정약용의 주역철학 / 황병기


예를 들면, 주역의 건乾 괘에서 맨 아래 효 (초구初九)의 효사가 잠룡물용潛龍勿用이다. (대선 주자로 거론되는 이들을 일컫는 '잠룡'이 여기서 유래하지만 의미는 조금 다른 듯하다.) 효사를 '아직 일러서 쓸 수 없는 인재' 정도로 해석하는데 건괘 전체의 강건하고 긍정적인 분위기와는 좀 거리가 있다. 정약용은 이 문제를 건괘 단독이 아닌, 건괘의 초구 효가 양에서 음으로 변하면서 ( 다산은 향해서 간다는 뜻의 '지之괘'라고 표현) 겸손하고 포용하는 구姤 괘로 옮겨가는 현상과 아울러 헤아려서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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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乾 구姤




다산은 의리역에 대한 비판 외에도 점을 치는 복서卜筮 역학의 본래 취지를 거스르는 세태에 대해서도 따끔하게 꾸짖었다. 점은 천명을 받들자는 것이지 엿보자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다산이 파악하는 점서로서의 역의 기능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점을 치는 목적은 하늘의 명을 청하여 그에 순종하기 위함稟命之義이었는데 춘추시대에 오면서 이미 기본적인 취지가 사라지고 오직 봉록과 지위를 탐하는 데에만 사용되었다. 천명을 엿보려는 뜻探命之義는 역易의 본래 취지가 아니다. 하늘의 뜻을 본받으려는 태도가 아니라 하늘과 신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정약용의 주역철학 / 황병기






정약용은 어려서부터 주역을 배웠을 터이지만, 강진의 단칸방에서 다시 책을 펴 들고 무서운 집념으로 파고들어 2천 년 중국 역학易學을 흔드는 학문적 업적을 달성했다. 조선 지성사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성과가 강진의 어수선한 주막집에서 태동한 것이다.


문득 깨닫는 바가 있는 듯하다가도 돌아보면 황홀*하고 어렴풋하여 들어갈 문을 찾을 수 없었다. 계해년 1803 늦봄부터 눈으로 보는 것 손으로 잡는 것, 입으로 읊조리는 것, 마음으로 사색하는 것, 필묵으로 적는 것부터 밥상을 대하고 뒷간에 가는 것, 손가락을 튕기고 배를 문지르는 것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주역이 아닌 것이 없었다. 

소설 목민심서 / 황인경

(황홀*恍惚 : 미묘하여 헤아려 알기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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