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강진, 흑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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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의 보은산 고성사는 사의재에서 약 4킬로 떨어진 보은산 중턱에 있는 절인데 해남 대흥사의 말사末寺다. 종무소 앞에 차를 세우고 가파른 비탈을 몇 걸음 더 올라가면 왼쪽으로 저만치 대웅전이 보이고 오른쪽에 아담한 보은산방이 들어앉았다. 안에 사람이 사는 것 같아 멀찍이서 사진만 찍었다.
정약용은 강진에 유배 와서 사의재에서 4년 지낸 후 고성사의 산방으로 거처를 옮긴다. 마늘 농사지은 돈을 노자 삼아 천 리 길을 내려온 아들 학연을 데리고 좀 한적한 곳에 가서 가르치고 싶었다. 그는 아들을 만난 반가움을 한시로 남겼다.
學稼來, 攜至寶恩山房有作
客來叩我戶, 熟視乃吾兒。
須髥鬱蒼古, 眉目差可知。
학가가 왔기에 그를 데리고 보은산방에 가서 짓다
객이 와 내 방문을 두드리는데
자세히 보니 바로 내 아들.
수염이 덥수룩하게 나긴 했으나
얼굴 모습은 알아보겠구나.
(학가: 학연의 아명兒名이나 초명初名)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교유하던 백련사 주지 혜장 선사의 배려로 고성사(암)의 보은 산방에서 4년간 지낸다. 당시 고성암은 백련사의 부속 암자였다. 다산보다 10살이 어린 혜장은 유학에도 해박했는데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의 학식에 감탄하며 자주 만나 학문을 토론하고 우정을 쌓았다.
당대의 학자 정약용과 학승 혜장의 교류에는 주역周易도 역할을 했다. 정약용이 형 약전에게 보낸 편지에 혜장과 주역을 논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보은산방에 묵을 때 젊은 승려들이 아홉 명이나 찾아와 함께 주역을 공부했다는 기록도 있다. 다산이 사의재에서 시작한 주역사전周易四箋의 저술 작업이 보은 산방에 와서 불이 붙었으리라 상상한다.
불교 사상은 내세來世를 강조함으로써 현세의 복락을 향한 인간의 욕심에 물을 탄다. 반면 유학은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천하를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목표로 하며 내세에 대해서는 유보적 태도를 취한다. 주역은 그런 유학 최고의 경전으로 길흉화복에 대처하는 처세의 도를 다루고 있다. 불교와 주역의 두 사상이 대립적으로 보이지만 상호 영향을 주며 사상적 깊이를 더해왔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은 우주 만물이 시시각각으로 변화하여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않다는 불교 3대 교리(삼법인三法印) 중 하나이다. ['무상'은 (허무보다는) 일정하지 않다는 의미] 주역에서도 우주 만물의 작동 원리를 변화로 규정하고 있다. 주역의 역易은 바뀐다는 뜻이며. 주역을 영어로 'The Book of Changes'라고 번역한다. 불교와 주역은 현실 세계의 모든 것은 매 순간 생멸生滅, 변화한다는 핵심 원리에서 서로 만난다.
보은 산방에서 남쪽으로 20분 정도 차를 타고 내려가면 강진만 서쪽에 다산 초당이 있다. 중턱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500 미터 정도 걸어 올라가면 초당에 다다른다. 좁고 가파른 산길 곳곳에 힘줄같이 튀어나온 나무뿌리가 얽혀있다. 정호승 시인은 이 길을 두고 '뿌리의 길'이라는 시를 지었다. 다산초당은 낙후되어 무너진 걸 다산유적보존회에서 1957년 복원했는데 이름과 달리 기와집이다. 곧 초가지붕으로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 이하 생략
뿌리의 길 / 정호승
보은산방과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4년을 보낸 정약용은 강진 유배 8년 차인 1808년 봄에 만덕산 자락의 다산 초당으로 거처를 옮긴다. 다산의 외가인 해남 윤 씨 집안 소유의 산정山亭 (산속에 지은 정자)에서 해배解配되는 1818년까지 10년 동안 기거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했다. 차茶 나무가 많은 지역으로 정약용의 호 다산茶山도 여기서 유래한다. 다산이 인근에 있는 백련사의 초의 선사와 왕래하며 걸었던 약 1킬로미터의 길도 운치가 있다.
다산초당의 현판은 추사 김정희 글씨를 집자해서 새겼다고 한다. 추사는 다산보다 20여 살이 어리지만 장기간 유배 생활을 한 공통점이 있고 한 동갑인 백련사의 초의 선사와도 교류했다.
다산이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학문을 수양하여 조선에서 으뜸가는 실학자로 우뚝 서게 된 배경에는 외가의 덕도 있었다. 강진 근처 해남에 해남 윤 씨 어초은 파의 종택인 '녹우당'이 있는데 그 안에 '만권당'이라는 장서각을 지어놓았다.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 등을 배출한 이 집안이 정약용에게 외가가 된다. 윤선도의 증손자가 윤두서, 윤두서의 외증손자가 정약용. 다산 초당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녹우당에 가면 고산 윤선도 유물 전시관도 둘러볼 수 있다.
외가의 장서량이 상당했기에 다산은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초당에 책 1000여 권씩을 쌓아놓고 연구·저술 작업에 매진할 수 있었다. 공무원들의 도덕성 회복을 주장하는 목민심서, 수사와 재판의 공정성을 강조하는 흠흠신서 등 500 권의 책을 초당에서 완성했는데 날카로운 현실 인식과 명쾌한 대안으로 지금까지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유배형은 원칙적으로 기한이 없는 종신형이다. 하지만 중앙으로 복귀할 가능성이 높은 세도가의 인물이 유배길에 오르면 고을 수령들은 조금이라도 잘 보여서 훗날 출세 길을 보장받기 위해 환대하기도 했다. 정약용은 경우가 달랐다.
정약용이 18년 동안이나 귀양 생활을 한 건 노론 벽파의 거두 서용보가 극렬하게 해배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과거에 정약용이 경기 지역 암행어사로 활동할 당시 경기 관찰사였던 서용보의 비리를 고발한 적이 있다. 설상가상으로 다산의 유배 기간 중 노론 벽파의 이안묵이 강진 현감으로 부임했는데 재임하는 동안 다산을 힘들게 했다고 전해진다.
첨에는 눈치가 빤한 강진의 주민들이 이빨 빠진 호랑이 정약용을 푸대접했지만 점차 그가 현지에서 학문에 몰두하고 제자를 양성하면서 여론이 돌아섰다.
다산은 중앙 학문과 개혁의 사상을 벽지 백성들에게 직접 전달하는 유배 문화의 모범을 실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