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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Sep 26. 2022

[영월] 메밀 전병 집 이야기

정직한 마케팅

강원도 영월읍엔 서부 시장이 있다. 6·25 동란 후 어려웠던 시절에 지역의 농부들이 새벽같이 농사진 걸 가지고 나와 팔고 아침에 돌아간다고 해서 서부 아침 시장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자 장터에 상인들도 들어와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내놓고 팔았다. 농민과 상인이 함께 물건을 팔면서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다. 영월 시외버스 터미널과 인접해 있어 교통도 편리하다.


지금은 상설 시장이 되어서 그런지 '아침'이 빠지고 그냥 서부 시장이다. 시장 이름에 '아침'을 그냥 놔뒀으면 어땠을까. 아침 시장인데 왜 저녁때까지 팔고 앉았냐고 시비 걸 사람 없다. 도리어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유래를 알게 되면 사연(story telling)이 있는 특별한 장소로 기억한다. 사람이나 시장이나 이름은 고유 명사다. 그 유래와 배경이 바뀌어도 이름은 우직하게 불변한다. 강북 성동구에 있던 옥정수玉井水 우물이 도로 공사로 매몰된 지 오래지만 옥수동玉水洞 이름은 그대로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다.


영월 서부시장 메밀 전병 골목


영월 서부 시장 안에 메밀 전병 골목이 있다. 어림잡아 50여 매대가 오밀조밀 모여 메밀가루로 부친 토속 음식을 만들어 파는데 메일 전병이 대표 메뉴다. 전국 택배도 주문 배수. 


즉석에서 부친 전병을 상자에 포장해 가거나 일식집처럼 주방 앞에 붙어 있는 카운터에 앉아 이것 조금 저것 조금 맛을 볼 수도 있다. 달라고 하면 막걸리도 냉장고에서 꺼내 준다. 메밀 전병과 옥수수 막걸리의 조합이 강원도스럽게 잘 어울린다.


메밀 전병은 메밀가루를 반죽해서 배추김치, 두부, 당면 등 다진 소를 넣고 김밥처럼 돌돌 말아 철판에 지진 강원도 전통 음식이다. 크기가 김밥 한 줄 만 한데 값도 옛날 김밥 천국이 진짜 천국이었던 시절의 그것과 같다.


내 눈엔 재료와 부치는 요령이 비슷해서 맛이 거기서 거기 일 듯한데 이 골목에도 사람이 유난히 몰리는 집들이 따로 있다. 


우리 식구가 가끔 가면 각기 들리는 가게가 다르다. 아내는 집, 나는 집으로 갈리고 유명한 집은 집이다. 둘이 같이 갈 때는 당연히 구매 책임자인 아내의 단골 집으로 끌려가지만, 어쩌다 나 혼자일 때는 집으로 가서 팔아준다. 방송에도 나왔다는 집은 입구에 있어 목이 좋아서 그런지 언제나 북적인다, 주인은 물론 맛으로 승부한다고 하겠지만.


아내가 거래하는 집도 잘 되는 집인데 젊은 사람들이 여럿 달라붙어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손님한테도 싹싹하다. 내 감성 기준으론 강원도 토속 음식 가게답지 않게 분위기가 좀 상업적이다. 반면 내가 가는 집은 절간 같다. 그 집을 처음 간 계기도 그래서였다.


어느 해 1월 친구들과 태백산 눈꽃 산행을 하고 오는 길에 영월읍에 들러 전병 골목을 찾았다. 안 되는 집에 가서 대접도 받고 도와도 줄 겸 골목에서 제일 한산한 가게를 찾아 앉은 게 집이었다. 여섯 명이 둘러앉으니 빈 집에 소 들어간 듯 매대가 꽉 찼다. 가게 주인의 얼굴에 생기가 도는 한편 갑자기 들이닥친 시끄러운 인간들 때문에 정신 용량이 약간 초과한 듯했다.


전병, 수수부꾸미 등을 시키면서 한 친구가 여기서 몇 년째 하냐고 물으니 주인아주머니 하는 말이 원래 시누이가 하던 걸 맡아서 한 지 몇 달 안 되어서 아직 서투르다고 한다. 서로 원조니 태조니 주장하며 업계 짬밥을 부풀리는 세상에 이 무슨 겸손 마케팅인가? 전통 음식을 만들어 팔면서 자진해서 초짜라고 고백하는 건 상업적인 자살행위이다. 하지만 그날 메밀전병은 물론 공갈 떡처럼 생긴 수수부꾸미 그리고 올챙이국수의 맛에 우리 모두가 만장일치로 엄지 척 한 이유는 비단 곁들여 넘긴 막걸리 기운만은 아니었다.


장갑을 놓고 와서 달포 후에 집을 다시 찾아가니 내게 장갑과 함께 천 원짜리 지폐를 내민다. 친구들하고 간 날 정신이 없어 실수로 천 원을 더 받았다는 거다. 그날도 집은 적막했다.


한참 후 메밀 전병을 대 여섯 상자 사 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차 서부 시장에 들렀다. 모처럼 큰 물량을 재량으로 구매하는 기회를 잡고 집으로 향했다. 주인의 기뻐하는 모습을 은근히 기대했는데 대뜸 아직 준비가 안되어서 그렇게 많이는 안된다고 딱 자른다. 헐! 통상 이런 경우 다른 가게는 박카스 한 병 꺼내 주면서 시간이 좀 걸리니 다른 데 일 보고 오라고 한다. 나는 집으로 내키지 않은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근무했던 어느 사회주의 국가의 국영 백화점 생각이 났다. ( 양말을 스무 켤레 사기 위해 공문까지 보냈던 기억이...)


한 번은 (물론 혼자) 집에 가니 매대에 전병 한 상자 분량이 보여, 더 만들어서 두 상자 달라고 하자 (내 눈에는) 아주머니가 조급한 마음에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다. 정상 조업이 안 되겠다 싶어 한 상자는 이미 만들어 놓은 수수부꾸미로 대체해 달라고 해서 사태를 수습했다. 그 후로 집에 가면 일단 매대에 만들어 놓은 품종별 재고조사를 하고 나서 주문한다. 일종의 오마카세 방식이다.


메밀 전병 집의 내 경험을 종합하면 재료 떨어지면 마감하는 배짱 마케팅도 아니고, 수요를 일부러 억제하는 역 마케팅 (demarketing) 도 아닌 정직한 마케팅이다. 의도적으로 그러는 게 아니므로 정직한 사업 방침이라고 정정해야겠다.


정직한 상행위는 융통성이 부족해서 기회를 놓치고 느리게 가지만 오래가고 최후의 승자가 된다. ( 되어야 마땅하다.) 정직한 상인은 소비자의 경계심을 해제하고, 자신의 입으로 전하는 열등한 부분은 대개 진실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집 앞에 긴 줄이 늘어서는 날을 기대한다.


'우리는 이등이라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라는 미국 렌터카 업체 Avis의 광고는 정직함으로 소비자의 신뢰를 얻은 이등 마케팅의 성공 사례다. 이 광고 덕에 매출이 연 35% 나 늘었다고 한다.





내가 혼자 메밀 전병을 사 가면 아내는 으레 집 것이려니 하고 맛에 대해 구시렁거린다. 이런 소비자들의 선입견 때문에 업계가 부익부 빈익빈 양극화한다. 담에 한번 몰래 집, 집 꺼를 섞어 사들고 가서 아내가 뭐라고 하는지 들어봐야겠다 (블라인드 테이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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