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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Sep 30. 2022

정약전·약용 형제의 유배지 4

전라남도 강진 , 흑산도

https://blog.naver.com/paulhhjo/222864611809

정약전·약용 형제의 유배지 : [강진, 흑산도] 1       

    

https://blog.naver.com/paulhhjo/222868239093

정약전·약용 형제의 유배지 : 강진, 흑산도 2              


https://blog.naver.com/paulhhjo/222874311956

정약전·약용 형제의 유배지 : 강진, 흑산도 3  



1801년 초 신유박해 때 정약전은 (완도 옆에 있는) 신지도로, 동생 약용은 (포항 근처) 장기로 유배되었다. 그러다 같은 해 가을 조카사위 황사영의 백서 사건이 터지자 형제는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은 뒤 각각 흑산도와 강진으로 이배移配 (유배지 이동) 되었다.


나주 율정점에서 동생 약용과 헤어진 손암 정약전은 지금의 나주 시청 근처 영산강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목포를 거쳐 흑산도로 향했다. 정약용은 걸어서 강진 땅으로.


흑산도 사리마을 유배공원


당시 보름 이상 배를 타고 가야 닿는 서해의 절해고도 흑산도에서 정약전은 15년간 귀양살이하다 죽음을 맞았다. 초기에는 우이도에 절도안치絶島安置되었다가 흑산도로 옮겨갔다. 말년에 다시 우이도로 돌아온 이유는 동생 약용이 해배되면 빨리 만나고 싶어서였다고 전해온다. 끝내 정약전은 동생을 만나지 못하고 죽었다. 우애가 각별했던 형제는 유배지에서의 왕성한 탐구욕과 후학 양성에 있어서도 닮은꼴이었다.


정약전도 유배지를 사랑했다. 주변 어부들의 힘을 빌려 흑산도 연해 어패류와 해조류의 이름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자료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저술했다. 해양 생물 총 55류 226종을 담고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어류도감을 낸 게 1814년이니 유배 간 지 3년 만이다.



자산어보 서문 / 고려대 도서관



3권 1 책의 자산어보 서문은 '흑산이란 이름이 하도 끔찍해서 식구들에게 쓰는 편지에는 자산玆山이라고 불렀다'로 시작한다. (옥편엔 검다는 뜻의 玆는 '현'으로 읽는다고 되어있다. 현산어보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바다에 물고기가 많이 사는데 그 이름을 다 아는 이가 드물어 학자적 사명감에서 탐구하고 작업했다는 대목이 서문에 있다. 믿을 만한 동네 사람 창대가 도움을 주었다며 책의 공저자共著者도 분명히 밝혔다.


어류도감인데 정작 그림이 없는 이유는 '그림은 믿을 게 못되니 글로 자세히 서술하는 게 나을 듯' 하다는 아우 약용의 말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림보다 글을 베끼는 게 훨씬 쉬우니 결과적으로 정확한 필사筆寫에 도움이 되었으리라.


흑산도 사리 마을 복성재


정약전은 유배지에 사촌서실이라는 초가를 짓고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는데 복성재復性齋라고도 부른다. 안내문에 복성재는 ‘정약전이 서학西學을 버리고 성리학性理學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라고 되어있다. 흑산도로 유배가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던데 천주교를 믿은 자신의 죄를 뉘우쳤다니 앞뒤가 안 맞는다. 유배 죄목이 사학邪學 죄인인 정약전이 조정에 선처를 바라는 제스처였을까? 


천주교의 입장은 다르다. 1902년 목포 성당의 드예 신부가 흑산도를 방문한 후 뮈텔 주교에게 보낸 사목 보고서에 사리 주민 박인수를 흑산도 유일의 가톨릭 신자로 기록했는데 그가 바로 정약전이 유배 시절 머물렀던 집안 사람이라는 거다. 복성復性은 사람의 본성性으로 돌아가는(復) 것이 도리라고 주장한 윤리학설에 나오는 개념이기도 하다.


정약전 적거지 / 조선말 거유 최익현도 흑산도에 유배당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쾌속선을 타고 가는 오늘날의 흑산도는 그리 멀지 않다. 목포 여객선 터미널에서 두 시간이면 도착한다. 배를 타기 전에 뱃멀미를 걱정했는데 먼바다에 들어서서도 별로 울렁거리지 않고 순항했다. 흑산도 항에 도착하니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가 흘러나오며 홍어 모양의 흑산도 안내석이 반겨준다. 흑산도에 1박 2일 머무는 동안 우리는 이 두 가지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 가는 데마다 흑산도 아가씨 노래에다 홍어회 식당이었다.


섬을 일주하는 관광 승합 택시에 올라탄 이유는 사리에 가기 위해서였다. 정약전의 적거지謫居地 (유배 가서 사는 곳)였던 사리는 흑산도 선착장이 있는 예리에서도 10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 직접 가는 대중 교통 수단이 마땅치 않다. 굽이굽이 섬을 돌아 여러 군데 들른 다음에야 택시는 사리에 정차했다. 같이 간 친구 그리고 택시 승객 중 한 사람과 함께 마을 중턱에 있는 복성재와 유배 공원을 주마간산 식으로 훑고 후딱 돌아왔는데도 택시에 남아있던 다른 승객들의 표정이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다. 유려하던 택시 기사의 설명도 가라앉았다. 정약전 유적지는 공동 관심사가 아니었구나.



흑산도 홍어 모양 안내석 / 흑산도 마을의 지붕이 일색이다. 그리스 산토리니?




같이 동행한 친구의 흑산도 기행 소감을 빌리자면, 흑산도는 이태리 나폴리에 견줄만한 자연과 자산어보 등 문화 스토리가 넘쳐나는데도 불구하고 관광 인프라가 열악해서 바다 건너 여행 가는 설렘을 감쇄한다. 환상적인 예리 항의 야경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즐비한 홍어회 가게의 연속이다. 홍어회를 먹어 보기도 전에 질려서 짜장면 생각이 났다. 그래서 흑산도는 홍도에서 돌아가는 길에 잠깐 들렀다 가는 데라고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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