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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Aug 26. 2022

얄타 협정의 교훈은 지금도 유효하다, 몹시.

독서록 : 얄타 8일간의 외교전쟁 / 세르히 플로히 지음

bbc.com



책 : 얄타 8일간의 외교전쟁 / 세르히 플로히 지음, 허승철 옮김

원서 : Yalta: The Price of Peace


2차 대전 전후戰後 처리를 협의한 정상급 회동이 여럿 있다. 그중 하나인 얄타 회담의 인상이 대개의 한국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이유는 어려서부터 38선이 그때 그어졌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밀약의 현장이라서 그런지 얄타라는 지명의 어감마저 야릇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얄타에서 누가 어떻게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했는지 들은 기억이 없다. 이 책엔 얄타에서 루스벨트와 스탈린이 불과 30분간 극동 문제를 의논하는 중간에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잠깐 거론했다는 대목이 있다.


얄타 회담의 주목적은 2차 대전 전승국인 미·영·소 3개국의 지도자가 패전국인 독일과 전리품인 폴란드의 처리 방식을 타협하기 위해서였다.


저자 세르히 플로히는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소련의 스탈린 서기장이 흑해 연안의 얄타에서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머물면서 협상하는 과정을 마치 실황 중계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기술하고 있다.


저자는 1991년 소련 해체 후 공개된 비밀문서, 영국과 미국의 외교 문서 그리고 회담 참석자들의 일기나 편지, 회고록 등을 바탕으로 지금은 우크라이나 땅인 크림반도 휴양지에서 여드레 동안의 회담을 복원했다. 나 같은 사람들은 국가 간 외교 협상의 내막을 첨부터 끝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없다. 기자회견에서 읽어 내려가는 공동 성명이나, 막후교섭의 일화를 부풀린 썰을 가끔 주워들을 따름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우리나라 관련 외교 활동들의 기록을 후일 공개하더라도 누가 이렇게 입체적으로 재구성해서 정리해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얄타 회담의 배경


1941년 이후 미·영 연합국은 독일에 대항해서 싸우는 소련에게 항공 지원은 제공했지만, 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전까지 서유럽 땅에 배치된 연합군 병력은 전무했다.


2차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갈 무렵인 1945년 초, 소련은 무서운 기세로 나치 독일을 몰아붙여서 동쪽 방어선을 뚫고 베를린 70킬로 전방인 오데르 강 서편에 교두보를 구축했다. 이미 전쟁 발발 전의 국경을 넘어 동유럽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한편 미·영 서방 연합군은 아르덴 (프랑스) 전선의 실패를 겨우 만회하고 베를린에서 600킬로 떨어진 라인강 도하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연합군의 수는 동부 전선에 배치된 소련군의 절반도 안 되었다.


처칠과 루스벨트는, 이대로 가면 스탈린이 히틀러와 강화조약을 맺는 등 자기가 정한 조건으로 유럽 전쟁을 끝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스탈린에게 여러 번 회담을 제의했으나 그는 장거리 여행이 어렵다는 이유로 미적거렸다.


시간은, 아쉬울 게 없는 스탈린의 편. 마침내 목마른 미·영 두 지도자가 우물을 팠다. 칠십이 넘은 처칠과 병약한 장애인 루스벨트는 스탈린이 회담 장소로 찍은 소련의 얄타로 배 타고 비행기 타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얄타 회담 전후前後 주요 사건


구글 지도

1939년 8월 : 독소 불가침 조약, 소련 외무부 장관 몰로토프와 나치 독일 외무부 장관 리벤트로프가 서명


1939년 9월 : 독일이 폴란드를 침입하여 유럽이 전쟁으로 돌입


1941년 6월 : 독일이 독소 불가침 조약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


1943년 11월 : 테헤란 회담, 미·영이 혼자서 독일 육군을 상대하는 소련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북프랑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하기로 결정.


1944 년 10 월 : 처칠·스탈린 모스크바 회담


1945년 2월 : 얄타 회담


1945년 4월 : 루스벨트 사망


1945년 5월 : 나치 독일 무조건 항복


1945년 7월 : 포츠담 회담, 베를린의 4개국 분할 점령과 폴란드 소련 위성 정부를 인정


얄타 회담의 주요 어젠다


독일의 분할 내지 해체, 폴란드 국경 설정과 새 정부 수립, 소련의 유엔 가입, 소련의 대일 참전 등을 가지고 협상하는 과정에 전쟁 배상금, 프랑스의 전승국 대우, 일본의 남 사할린, 쿠릴열도를 소련에 할양하는 지엽적인 문제들이 주요 안건의 합의 대가로 동원되었다. 한반도의 신탁통치 원칙도 소련의 대일 참전 협의 중에 거론되었다.


얄타 회담의 주요 합의 사항


독일 동부 국경을 오데르 강과 나이세 강으로 정함

독일을 미·영·소·프 4개국이 분할 점령한다는 원칙

독일의 군수산업을 폐쇄하거나 몰수

배상금은 추후 결정

독소 불가침 조약에서 합의한 몰로토프 - 리벤트로프 라인 상의 폴란드 동부 영토 대부분을 소련에 병합.

소련의 대일 참전

유엔 창설의 기초 마련


3 거두 :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2차 대전 후 국제 정치 질서 재편에 끼친 엄청난 영향력에 걸맞게 얄타 회담의 세 지도자를 3 거두巨頭 towering figure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3 거두는 머리통이나 키가 특별나게 크지 않은 생물학적으로 보통의 인간이다. 심지어 한 사람(루스벨트)은 지체가 불편한 장애인이다. 이들이 모여서 서로 고집부리고, 화내고, 협상하고, 양보하면서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인명과 재산 피해를 초래한 전쟁의 뒤처리를 결정했다. 회담의 결과물이 모두 이성적이지는 않다. 당대의 최고 협상가들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의 개인적인 신념, 정서 그리고 회담 기간 중의 몸 상태가 전후 세계사의 변수로 작용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지도자들의 회담에 앞서 매일 각국의 실무자 격인 외무부 장관이나 군 사령관들이 각국의 카운터 파트와 만나 조율을 하고 나서 늦은 오후 보스들의 담판으로 넘기는 방식으로 회담이 진행되었다. 때로는 한 나라의 지도자가 상대국의 외무부 장관을 따로 불러 대화하거나 지도자끼리 편지와 메모를 주고받으면서 자국의 이익과 자신의 소신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만찬을 주최하여 교착상태에 놓인 사안에 윤활유를 치기도 했다.


삼국의 입장이 서로 다르고 한 안건의 해결이 다음 안건의 향방에 영향을 주는 외교 현장에서 동시에 여러 조각의 퍼즐을 맞추는 고난도의 게임을 진행해나간다. 미리 실무자들이 말을 맞춘 다음 정상이 만나서 발표하고 밥 먹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각 지도자의 뚝심과 협상 기술이 여느 때 보다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얄타 회담을 세 지도자의 시각에서 재구성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가 된다.


처칠


영국의 처칠 수상은 얄타 회담 내내 주요 쟁점에서 소련의 스탈린과 적수가 되었다 (p214).


미·영 연합국은 전후 독일 점령을 지속하기 위해 프랑스의 도움이 필요했다. 독일의 위협에 대한 프랑스의 완충 역할을 기대한 처칠은 프랑스에 전승국 지위를 부여하고 연합국 통제 위원회에 끼워 주자는 제안을 성사시켰다. 종전 후 프랑스는 미·영·소와 함께 베를린을 분할 점령하게 된다.


소련도 같은 이유로 독일에 대항할 동맹국으로 동쪽에 폴란드를 내세웠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 ( 순망치한脣亡齒寒 ). 이웃에 바로 강국이 붙어있거나 이웃이 강국이 되는 걸 편안해하는 나라는 없다. 중국이나 일본이 한반도의 통일을 달가워하지 않는 이유다.


그러나 독일을 처리하는 강도에 있어서 처칠과 스탈린은 차이가 있었다. 스탈린은 과도한 배상금 등으로 독일을 고사시키려고 했으나, 처칠은 말에 건초를 주어야 마차를 끌 수 있다는 설득으로 독일이 최저 생계를 유지하는 수준으로 조정했다. 처칠은 독일이 영국에 재정적 부담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또한 독일이 완전히 해체되어 소련의 영향력이 서진西進하는 것도 신경 쓰였다.


회담에서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과 자유 민주주의 진영 공동 전략을 추구했으나 루스벨트의 비협조로 처칠의 입장은 시종 불리했다. 폴란드의 운명이 얄타에서 영국에 가장 중요한 의제였으나, 미국은 세계 기구에 너무 큰 비중을 두는 반면 폴란드에는 신경을 덜 썼다. 결과적으로 스탈린의 요구에 굴복하여 처칠이 주장한 폴란드의 중립적인 정부 구성은 실패하고 국경도 서쪽으로 확장되었다.


처칠은 독일 군국 주의의 부활을 견제하는 입장에서는 스탈린과 동일했지만, 소련 공산당의 초국가적 야망의 위협도 경계했다. 독일에 대항하기 위해 소련과 동맹은 맺었어도 붉은 위협이 독일의 제국주의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처칠은 공산주의가 무서운 위협이 된다는 견해를 바꾼 적이 없었다. 다음에 전쟁이 나면 이념 전쟁일 거라는 예언을 했고 (p 93, 254), 후일 루스벨트 사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트루먼에게 '철의 장막' 이란 표현을 썼다. (p686)


처칠은 현명한 안목으로 미래를 투시하고 소련 공산 세력의 팽창에 경계 신호를 보냈지만, 안타깝게도 당면한 어젠다 해결에 매몰된 루스벨트는 그 신호를 해독하지 못하고 번번이 스탈린의 손을 들어주었다.


스탈린


조지아 구두 수선공의 아들인 스탈린은 얄타에서 명문 집안 출신의 처칠이나 루스벨트보다 영리한 협상가로 등장한다.


처칠과 마찬가지로 얄타에서 스탈린의 주요 관심사는 폴란드였다. 스탈린은 독일이 과거에 폴란드를 거쳐 두 차례나 러시아를 공격했다는 사실을 빌미로 폴란드의 서쪽 국경 확대와 친소 정부 수립을 관철시켰다. 폴란드의 동부 영토를 소련에 병합시키고 대신 독일의 동부 일부를 폴란드에 떼어주었다. 지도상에서 소련이 폴란드를 서쪽 방향으로 쭉 밀어낸 셈이다.


스탈린에게는 폴란드의 자유 독립보다 소련의 명예와 생사가 훨씬 더 큰 가치였다 (p319). 폴란드가 독일을 기계적으로 봉쇄하는 것만으로는 불안하다고 엄살을 떨며 내부 인적 봉쇄를 이유로 친소 루블린 정부를 내세웠다. 영국이 벨기에나 네덜란드와 협정을 맺듯이, 소련도 인접 국가들과 협정 맺을 권리가 있다고 우겼다.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도 '폴란드는 이미 해방되었으니 ( = 소련이 점령했으니) 영국은 간섭하지 말라'고 거들었다. (P160)


스탈린은 '전쟁 중의 외교에서는 지상에 가장 많은 병력을 둔 나라의 목소리가 제일 크다'라는 경험칙을 증명했다. 전쟁에 패배한 국가는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독일에 굳건히 맞서서 큰 희생을 치른 국가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며 처칠과 정치 문화적 차이를 보였다.( p219)


스탈린은 지엽적인 사안의 흥정에서도 실속을 챙겼다. 연합국 통제 위원회의 일원으로 프랑스를 인정하는 대가로 독일에 부과할 배상금 100억 불 원칙을 고수했고 (= 프랑스 칩을 100억 불과 교환), 유엔 안보리 표결 방식을 양보하는 대신 폴란드의 정부 수립을 그의 의지대로 이루었다. 또한 대對 일본 참전(을 하겠다고 말한) 대가로 중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일본의 남 사할린과 쿠릴열도를 되찾았다.


당시 스탈린의 외교 목표를 보면 공산주의가 세계를 지배하는 비전보다는 핀란드와 발트 3국, 폴란드 동부 등지에서 세력을 재확립하는 제정 러시아 차르의 지정학적 야망에 가깝다. 한 지역이 공산주의적인지 여부보다는 모스크바의 지배를 받느냐가 핵심 사안이었다. 스탈린이 볼셰비키 혁명으로 쫓겨난 차르의 전략을 답습했듯이, 오늘날 러시아인은 잔혹한 스탈린 시대를 경멸하면서도 그 시대의 강한 조국상을 그리워한다. 푸틴의 장기집권은 그런 기대와 열망의 집약이다 (언론 기사).


루스벨트


루스벨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가 동부 유럽과 극동을 스탈린에게 팔아넘겼다고 분개한다. 얄타의 에이스로서 효과적인 중재자를 표방했던 루스벨트가 감수해야 할 비난이다.


얄타에서 루스벨트는 유엔 창설과 대일 태평양 전쟁의 종식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스탈린과 처칠은 별로 관심이 없는 루스벨트의 외로운 어젠다였다.


유엔 창설의 두 가지 장애는 소련 유엔 참여 약속과 미국 의회의 지지였다. 소련의 참여 없이는 어떠한 평화 정착 제도도 지속될 수 없다는 판단을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공유하고 있었다.


스탈린의 최고 관심사인 폴란드에서 루스벨트가 한발 물러서는 전략은 타협이자 장기적인 관계 구축이기도 했다. 루스벨트는 국가 정상 간의 개인적 관계의 힘을 믿었다. 스탈린과의 관계를 대 소련 정책의 근간으로, 스탈린에게 우정을 보이고 그 보상으로 우정을 얻기를 희망했다. 미·영이 자신을 상대로 연합전선을 펴고 있다고 의심할 스탈린을 우려해서 루스벨트는 의식적으로 처칠과 거리를 두고 사전 회담을 자제했다. (p73)


루스벨트의 참모들도 동부 유럽에서 소련의 군사적 우위를 현실로 인정할지, 아니면 그들의 지배를 인정하지만 소련을 설득을 할지 고민하다 소련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겠다는 맘 편한 결론에 이르렀다. 소련과 동맹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p295). 그 대가가 무언지 알았어도 그런 판단을 했을까?


결국 루스벨트는 폴란드(그리고 더 나아가 동유럽의 나머지 지역)와 독일의 분할에 대한 스탈린의 요구에 굴복하고 소련의 유엔 참가 약속을 얻어냈다. 루스벨트가 세계를 위한 처방을 하는 동안 스탈린은 소련이 삼킬 수 있는 게 무언지 명확히 했다( p255).


루스벨트에 대한 다른 비판 지점은 소련을 대일전에 참전시킬 필요가 없었다는 믿음이다.


미국의 레이히 제독은 일본 열도와 아직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는 중국 본토에서 치러야 할 전투에서 최소 수십만의 미 육군, 해군의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봤다. 당시 원자탄 생산 여부, 실전 사용 가능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루스벨트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을 패퇴시키는데 영국이 아닌 소련의 실질적 도움이 아쉬웠다.


절박한 루스벨트는 극동에 대한 소련의 요구를 묵인했고 소련 2개 위성 공화국의 유엔 참가도 수락했다.


루스벨트는 얄타에서 주요 현안에 대해 이전 입장에 명백히 위배되는 양보를 하거나 참모들과 상의하지 않은 채 즉석에서 자발적으로 양보한 적인 없고 얄타와 테헤란에서 입장은 놀랄 만큼 일관성 있었다(p 710)라고 하지만,


루스벨트가 소련의 팽창을 즉각적인 위협으로 보고 뿌리 깊은 정치적 문화적 차이를 못 본체 넘어가지 않았다면,


3 거두가 서로를 갈라놓을 만한 문제들을 피하면서 전술적 합의에 도달하지 않았다면,


문화적 몰이해와 잘못된 계산이 미래의 분쟁을 일으킬 상황을 두려워했다면,


루스벨트가 얄타에서 성급하게 회담을 끝내지 않고 버틸 만큼 건강했어도,



루스벨트가 스탈린에게 그렇게 퍼 주었을까? 폴란드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요프타!' (얄타) 하며 탄식할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역사도 가정을 해봐야 실력이 늘고 실수를 줄인다.


얄타 회담의 교훈


p 716 에필로그


얄타 회담의 교훈은 이 책의 영문판 제목 ' Yalta: The Price of Peace 평화의 대가 '로 함축되고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끝에 잘 요약되어 있으며, 지금도 유효하다, 몹시도.


프롤로그의 끝


아무리 회담 결과가 고무적이라고 해도 민주적 지도자들과 사회는 똑같은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 대가를 줄이는 유일한 방법은 적을 아는 것 못지않게 최소한 자신의 우방도 잘 아는 것이다.


얄타 회담과 그 후의 결과가 보여주듯이 동맹국을 함께 묶는 공동의 가치가 없는 상태에서 친구와 적의 차이는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p 44)


에필로그의 끝


민주국가 지도자들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독재체제 및 전체주의 정권과 동맹을 맺는 데 따르는 대가가 있다.


편의상 동맹을 지원해서 힘을 기르게 만들면 다음에는 그를 제어하는 일이 어려워진다. 동맹이 공통의 가치와 원칙에 기반하지 않는 한 처음의 갈등이 끝나고 나면 적의 적은 당신의 적이 될 수도 있다.


민주주의는 오직 민주주의와 동맹을 맺어야 하고 공동의 가치가 앞으로의 동맹에 유일한 기초가 되어야 한다.

(p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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