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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Jun 14. 2022

삶은  명사,  죽음은  동사

독서록 : 어떻게 죽을 것인가 / 아툴 가완디 저

책의 목차


책 : 어떻게 죽을 것인가 / 아툴 가완디 저, 김희정 옮김


요양원은 노령에 접어들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일반 병원의) 병실을 비우기 위해 시작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현대 사회가 노인 문제에 대처해 온 변함없는 패턴이다. 우리가 만들어 낸 시스템은 거의 항상 무언가 다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안이었던 것이다.
p 116 


현대 의학과 공중보건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은 연장되었지만, 동시에 빠르게 늘고 있는 노령인구의 돌봄 부담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미국의 외과 의사이자 공중 보건 정책 전문가인 저자는 책에서, 노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품격 있게) 살아가다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는 현실과 현대 의학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생명을 연장하는 노력에만 집중하다가 오히려 꺼져가는 생명을 살피는 본분은 놓치고 마는 의료 시스템의 '불편한 진실'을 파헤쳤다. 아울러 노령 환자의 치료와 돌봄을 병행하는 미국과 유럽의 몇몇 실험적인 요양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저자는 자신의 아버지 ( 역시 의사였음 )의 죽음을 사례로 책을 마무리하면서 말기 환자의 치료와 돌봄에 대한 의학적, 철학적 고민을 토로한다.


책의 한국어판 제목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이지만, 죽는 자가 선택할 수 있는 '어떻게'가 아직은 많지 않다는 게 이 책의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노령화


과거에는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는 경우가 흔치 않았고....

부모를 돌보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한 자녀는 일찍 집을 떠난 자녀보다 많이 물려받을 거라는 전망이 있었다. 그러나 부모들이 훨씬 오래 살면서 긴장 관계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에게 전통적인 가족구조는 안정과 보호를 제공하는 원천이라기보다 부동산과 재산 그리고 심지어는 생활방식과 같이 가장 기본적인 결정 사항들을 둘러싼 투쟁의 장이 되어버렸다. 

p 37, 39 


수명이 연장되며 노인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과거에 비해 완만하고 길게 진행된다. 70대 아들이 90대 어머니의 간병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 가족이 집에서 노인을 모시고 살다 임종을 지키는 경우가 드물어졌다. 노인 돌봄의 문제는 인구 고령화가 가속되는 선진국의 공통 문제가 되었다.


유럽에선 80세 이상 노인 중 10%만이 자식과 같이 살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노부모를 직접 봉양하는 경로효친 사상은 이제 실천하기 어려운 덕목이 되고 있다. 거동이 불편하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노인을 외부에 위탁해서 돌보는 추세다. 부모를 돌보는 시간에 일을 하고 그 소득으로 부모를 외부 시설에 맡기는 편이 더 경제적이라는 명분도 한몫한다.



돌봄의 문제


앨리스 할머니는 사생활과 삶에 대한 주도권을 모두 잃었다. 병원 환자복을 입고 지낼 때가 대부분이었다. 직원들이 깨우면 일어나고, 목욕시켜 주면 하고, 옷을 입혀 주면 입고, 먹으라고 하면 먹었다. 또한 직원들이 정해 주는 아무 하고나 같은 방을 써야 했다. 할머니의 생각과 관계없이 선택된 룸메이트들이 여러 명 거쳐 갔다. 모두 인지 능력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조용했고, 어떤 사람은 밤에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었다. 할머니는 감금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늙었다는 죄로 감옥에 갇힌 것만 같았다.

p119


강도 높은 요양 근로는 전문 요양사와 피 요양자 간 양측에 불만과 긴장을 조성한다.


치매 부모를 수발하다 하도 힘들어 목을 조르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는 끔찍한 고백이 여러 책들에서 발견된다 ( 본문 p138, 새벽 세시의 몸들에게 / 전희경 외 3인 저). 한편 시설에 위탁된 대부분의 노인은 죽을 때까지 짧지 않은 세월을 시설의 통제를 받으면서 소비하고, '무너지고' 죽음에 이른다.


24시간 간병이 필요한 환자를 돌보지 않으면 환자 인권침해이고,
24시간 간병을 도맡게 하면 간병인 인권침해에 해당한다.

새벽 세시의 몸들에게 / 전희경 외 3인 저


의료 전문가들이 신체 능력에 따라 획일적으로 매긴 독립성 등급에 따라 시설에 보내진 피 요양인은 안전과 치료 위주로 '관리'당한다.' 소소한 선택과 개인의 우선순위가 무시된 채, 환자의 자녀가 '안전'하다고 판단한 환경에서 의료 서비스와 의식주만 제공받으며 그저 존재하기만 할 뿐이다.


2,500년 전에 공자도 비슷한 경고를 했다. 부모를 공경심 없이 모시는 게 개나 말을 키우는 것과 뭐가 다르냐는 거였다. 

子曰 今之孝者 是謂能養 至於犬馬 皆能有養不敬何以別乎 자왈 금지효자 시위능양 지어견마 개능유양 불경하이별호

공자왈, 요즘에 효는 부모님께 음식을 잘해드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개나 말도 잘 먹여 키우니 공경하는 마음이 없으면 무엇이 다르냐?  

논어 위정편 / 낭송 논어 



돌봄의 대안 : assisted living


'파크 플레이스'의 일부 주민들은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아무도 환자라고 불리지 않았다...

 모두 욕조와 샤워 시설을 완비한 욕실, 부엌, 잠글 수 있는 현관문을 갖춘 개인 아파트에서 살았다...

 누가 언제 자기 집에 들어올 수 있는지도 스스로 결정하도록 했다.

중략

서비스는 대부분 요양원에서 제공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러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항상 타인의 집에 들어간다는 개념을 이해하고 있다는 게 달랐다. 그리고 그 사실이 단지團地 내의 역학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p146


가장 중요한 사실은 요양원 노인들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제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것이 전부다.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모를 정도로 치매가 심한 노인들마저도 더 의미 있고, 기쁘고, 만족스러운 삶을 경험하는 것이 가능했다. 얼마나 약을 덜먹고, 얼마나 더 오래 살 수 있는지에 대한 것보다 사람답게 사는 일에 대해 사람들이 얼마만큼 더 가치를 두는지 측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있을까?

p196


요양원 환자에게 자율성과 사생활을 유지하는 공간을 제공하는 새로운 개념의 파크 플레이스 실험은 초기엔 보호 대상인 환자의 안전을 보장할 수단이 없다는 점 때문에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 assisted living의 추적조사 결과는 환자의 만족도가 높아지고 신체기능과 인지 능력이 향상되었을 뿐 아니라 심각한 우울증 건수는 감소하는 대성공이었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나이가 듦에 따라 무언가를 달성하고 소유하고 획득하는 것보다 일상의 기쁨과 인간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부터는 그다지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자기 삶의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 바라고 다른 사람이나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미치 앨범의 책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서도 '(죽음을 앞둔) 모리 교수를 힘들게 한 것은 죽음이 아니고 잊히는 것'이라는 대목이 있다. 결국 인간은 인간관계에서만 인간인 것이다.



인간다운 마무리


이것이 바로 수백만 번 반복되는 현대의 비극이다...

혈관에 화학약품을 투여하고, 목구멍에 관을 삽입하고, 살에 수술로 꿰맨 자국을 가진 채 죽어가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더 단축시키고 삶의 질을 악화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p266


현재의 의료법과 시스템은 말기 환자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소생 확률이 제로에 수렴하는 치료법으로 마지막까지 의학적인 투쟁을 벌이다 죽게 만든다. 아프기 때문에 더 아픈 형벌을 받아 죽는 순간까지 고통을 당한다.


말기 환자는 생명 연장 말고도 더 중요한 일들이 많다. 무의미한 고통을 피하고, 가족, 친구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정신적 능력을 잃지 않고 자신의 삶이 완결되었다는 느낌을 자각하는 것이다.


호스피스는 회복이 불가한 환자와 가족의 신체적, 심리적 고통을 덜어주는 요법이다. 치료를 중단하는 게 아닌 환자 위주의 우선순위에 의한 총체적인 돌봄인 셈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심신이 온전치 않아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과정을 거쳐서 마지막 죽음에 이른다. 생을 오래 유지하기보다 존엄하게 마감하고 싶은 것은 모든 이의 공통 희망일터이지만, 이를 보장할 수 있는 가족이나 사회의 도움은 아직 요원하다.


개인이 강구할 수 있는 대책은 사전 연명 치료 중단 의향을 미리 등록시키는 정도밖에 없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존엄사를 법적으로 허용한다는 스위스의 기관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소박하지만 주도적으로 삶을 통제한 스캇 니어링 Scott Nearing의 사례를 따르고 싶다는 이도 있다.


의술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은 늘어났지만 그에 수반되는 문제를 사회가 감당하지 못해 불우한 노년을 보낸다. 과식해서 얻은 성인병으로 고생하는 현대인의 자업자득과 같다.






삶은 죽음으로 마감된다. 


죽음은 삶의 맞은편에 있지 않다.

죽음은 삶이 끝나는 순간의 동작일 뿐이다.


삶은 명사고 죽음은 동사다. 

삶과 죽음은 한 켤레가 아니고 비교 대상도 아니다. 


인간에게는 삶의 경험과 비교할 사후死後의 정보가 없다.

생명의 원천을 모르듯이 사후 세계에 대해선 믿음만 있다. 

모르기 때문에, 순간의 일회성 따끔함때문에 우리는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지 모른다.


삶이 성공이 아닌 것처럼 죽음도 실패가 아니다. 


주어진 생명에 감사하고 죽음에 충분히 저항하며 살아낸 다음, 

자기 생에 마침표 하나 찍을 지점을 정하고,

스스로 하차 벨을 누르는 선택이 과연 극단적일까?


'죽는다' 동사의 주어는 '나'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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