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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May 21. 2022

에도 시대에 시작된 한 일 격차

독서록 :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 신상목 저


고대 중화문명 확산 경로의 선후관계에서 비롯된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은 에도시대로까지 자연스럽게 연장되고 고정 관념화되어있다. 단언컨대 일본의 근세 260년을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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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일본사 / 신상목 저


독서 동아리에서 함께 읽고 이야기 한 내용을 요약합니다.





도쿄까지 비행시간이 두 시간이 넘는다는 얘기를 듣고 투덜댔다. 무슨 두 시간씩이나. 직선거리로 서울에서 제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외국의 수도는 도쿄가 아니고 북경이라고 한다. 일본 땅이 한반도보다 많이 넓다는 것도 고등학교 졸업하고 알았다, 부끄럽지만. 


우리나라 사람은 일본이 세계 2위 경제 대국일 때는 무시했고, 중국에 이어 3위가 된 지금 한국이 이미 일본을 추월한 걸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만큼 일본을 과소평가하는 나라도 없다는 말이 맞다. 


저자는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급속한 근대화에 성공하여 국력을 키웠고 조선은 그러지 못해 일본에 주권을 빼앗겼다는 일반의 인식을 바로잡으려고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하여 열강의 반열에 오른 원동력을 메이지 유신 전 에도江戸 시대와 에도 공간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에도 시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를 개창한 1603년부터 천황에게 권력을 이양한 1867년까지 260년간을 가리킨다. 이 기간 중 일본은 경제, 문화, 교육, 과학 등의 분야에서 근대화의 초석을 마련했다


경제


에도 막부의 이에야스는 지방의 영주인 다이묘大名들에게 천하보청을 선포하는데 이게 결과적으로 일본 근세의 경제 근대화에 엄청나게 기여했다.


천하보청은 징세권이 없는 막부가 전시戰時에 다이묘에게 부과하는 군역의 연장으로서 성곽 축성, 제방, 도로 등의 건설이 있다. 현금이나 현물을 징수하는 세금이 도중에 착복되고 증발하는데 비해 천하보청은 누수 없이 모두 실물 인프라로 전환되는 장점이 있었다. 다이묘가 건설에 필요한 자재와 전문 인력을 조달하는 시장이 형성되면서 근대 유통 경제의 단초가 마련되었다.


막부는 지방의 다이묘에게 자치권을 부여하는 대신 천하보청과 함께 참근교대 제도로 그들을 통제했다. 다이묘가 정실과 적자를 에도에 남겨두고 번藩을 오가며 생활하는 제도가 참근교대다. 대규모 인원이 원거리를 이동하면서 경제적 파급효과가 컸다. 여행 비용과 (에도)체류 비용이 발생하니 거대한 소비 시장이 형성되고 도시가 발달했다. 원거리 유통을 위한 화폐경제와 원시적인 수준이지만 신용 결제 경제도 태동했다.


문화


17세기 이후 출판문화가 성장하고 19세기에 들어 거의 모든 일본 국민이 책을 일상생활의 필수품으로 활용하는 출판 대국이 되었다.


포르노로 시작한 출판 혁명은 판권의 인정과 대여업으로 가속화되었다. 특히 판권을 소유 양도가 가능한 재산으로 인정하는 (유럽에서 도입 전에) 자생적 규범으로 창작 의욕을 북돋우었다.


읽을거리가 많아지자 사회 전반에 글을 배우려는 의욕이 높아졌다. 기층민들이 독서를 통해 유교의 이념을 습득하고 일상생활에 체화했다. 정보가 특권 계층에 의해 독점되지 않고 대중에게 보급되는 불가역적인 사회 변혁이 일어났다.


19세기 초 서양 선교사가 '이 나라(일본)는 시골의 어린 계집아이도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라고 했다.


19세기 말 영국의 지리학자 버나드 비숍이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묘사한 조선의 실정과 대비된다.


(조선에서 ) 언어는 이원화되어있고 교육받은 계층은 중국 말을 가능한 한 대화에 집어넣는다. 모든 종류의 문학은 중국어로 되어있고 조선 글자인 언문은 식자층으로부터 전적으로 무시당한다. 조선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자신들의 알파벳을 보유하고 있다.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 버나드 비숍


문자를 독점하고 읽기를 제한하는 사회는 발전할 수 없다.


조선은 주희의 유교 교리 해석에 매몰되어서, 다르게 해석하는 선비를 사문난적이라고 배척하였다. 당시 일본도 주자학이 중앙 막부의 관학이기는 하였지만, 시대 변화에 민감한 지방의 번藩에서는 주자학의 교조적 관념론을 비판하고 현실적인 세계관으로 기성 관념을 혁파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개혁적 사상가인 오규 소라이는 중국 고어를 집중적으로 연마하여 유교 경전을 (주자의 주석이 아닌) 원전을 통해 직접 해석하는 방법론을 제시했다.


교육


개인적으로 문하생을 모집하여 가르치는 주쿠塾가 유행했다. 신분과 지위에 구애받지 않고 난학, 병학, 의학 등 전문적 실용 학문을 배울 수 있는 문호 개방형 교육기관이 크게 늘어났다. 주쿠의 문하생들 중엔 기성 체제에 불만을 느끼는 하층 무사, 상인, 농민 출신들이 많아서 신지식인의 산실이 되었다. 성리학을 주요 과목으로 가르친 조선시대 서원과 비교된다.


서구 문명의 흡수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는 의학, 천문학 등 실용적 학문을 네덜란드인으로부터 배웠다. 생소한 사물과 개념을 연구하고 번역하기 (난학) 위해 고민하는 문화 충돌을 감수하며 근대 유럽 문명을 도입했다. 일본의 근대화는 서구의 관념을 일본의 관념으로 변환시키고 내재화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관광


참근교대제로 도로망이 정비되고 여행이 대중화되었다.


나라의 위용과 위대함을 상징하는 빛나는 자랑거리를 직접 목도하고 체험하는 관광觀(國之)光의 속성이 다른 나라보다 일찍 발현되면서 통치기반의 강화로 연결되었다.


觀國之光, 利用賓于王 관국지광 이용빈우왕
나라의 빛남을 보는 것이니 왕에게 제대로 대접받는 신하가 되는 것이 이롭다.
주역 관觀 괘 육사 효




당시 조선과 일본의 지배계층은 공히 통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신분제를 이용했다. 하지만 일본 에도江戶막부시대의 천하보청과 참근교대제는 경제뿐만 아니라 불가피하게 신분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거대한 시장과 막대한 지출로 상인과 노동자들이 부를 축적하며 서민 계급이 실세로 등장했다. 신분의 경계를 관통하는 상업 활동이 전국 규모로 확대되고, 문화와 교육 분야에 서민의 진출이 두드러졌으며 이는 사회 발전으로 선순환했다.


일본의 왕성한 경제 문화 근대화 과정에서 신분의 장벽이 퇴색한 반면, 조선 사회에서는 상민이 돈을 주고 양반 신분을 사는 신분 세탁이 사회를 혼란하게 만들었다.




독서 동아리의 화두


일본이 근세에 다른 동아시아 국가와 달리 서양 패러다임의 근대화를 진행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 판권이나 신용거래 같은 서양의 규범이 이미 자생적으로 발달했다.                                                 

- 막번체제幕藩體制하에 지방 분권으로 민간 주도의 경쟁과 자율이 가능했고 사회 발전으로 이어졌다.                                          


모방의 대상에 대한 판단이 필요하다는 관점에서 보면 모방도 창의적인 활동이다.


유학의 새로운 해석과 주자학에 대한 저항이 사회 변화에 기여했다기보다 사회변혁의 결과로 볼 수도 있다.


조선은 끝까지 신분제를 유지하면서 수직적인 수탈 구조로 하층민을 핍박한 반면, 일본은 막부가 다이묘를 견제하기 위한 여러 제도를 시행하면서 결과적으로 서민도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 당시 한중일을 비교해 볼 때 한국과 중국의 사회가 완성에 가까워 제도 변혁에 소극적이었던 반면, 역동적인 일본 사회는 비교적 진보적으로 변혁을 수용했다.


사피엔스를 쓴 유발 하라리에 의하면 ; 유럽에서 15세기 이후 인쇄술의 발달로 책의 보급이 쉬워지면서 중세의 성서 번역 금지 같은 소수 지배 계급의 지식 독점이 무너졌다. 지식의 대중화는 18세기 말 산업 혁명과 시민혁명을 맞이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일본에서도 에도 시대 출판 혁명 덕분에 지식이 대중화하고 정보가 자유롭게 유통되면서 근대화에 기여했다.  

한일 양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벌어진 엄청난 격차와 시차는 지금 양국 간에 어떻게 존재하고 있나?       

- 한국의 급격한 경제 발전으로 그 격차가 줄어들었다.                                                  

- 한일 간의 격차는 단순한 GDP 차이 이상으로 여전히 존재한다.


일본을 알아야 일본을 극복할 수 있고 과거사에 매어 있는 한일 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 과거사 문제도 우리가 힘을 기르고 진정성을 가지고 대응하면 성과가 나오지 않겠는가?                           

- 우리는 일본을 알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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