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감 Feb 15. 2022

말은 열등하다

도가도 비상도 道可道, 非常道.

Photo by Mikhail Nilov from Pexels


도가도 비상도 道可道, 非常道...
도가 말해질 수 있다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노자 도덕경 1장


노자의 도덕경은 초장부터 '아니다'로 시작한다.

요새 부정 어법으로 소비자를 현혹시키는 상인들이 있던데 ( 침대는 가구가 아니다 ),

노자의 도道 마케팅인가?


비非는 '아니다'라는 부정과 함께 '그르다'라고 나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非人, 是非曲直)


말해질 수 있는 도 (가도可道)  진정한 도 (상도常道)에서,


판단의 대상인 말해질 수 있는 도는 기준이 되는 진정한 도가 아닐뿐더러 그르다라고도 확대 해석할 수 있다, 가도에겐 미안하지만.


은 도道를 설명하는 데 되레 방해가 된다고 혀를 차는 노자를 상상한다.


측정하면 운동량이 변화된다는 불확정성의 원리마냥, 입 밖으로 나온 는 이미 약발이 떨어졌다고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노자에서 도道는 우주 만물이 생기고 완성되는 원리다.


역이불역易而不易, 변하지만 변화하는 규칙은 변하지 않는 도道가 상도常道다.

상도는 진정한 이며 우주의 길을 걸어가서 만나는 궁극적 실체다.


주역의 32번째 뇌풍항雷風恒 괘에서 정이천은 천지天地가 그치지 않는 까닭을 항구恒久의 도道라고 풀었다. 天地之所以不已 蓋有恒久之道


그리고 항恒의 개념은 일정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짚었다. 일정하면 항상하지 못한다. 오직 때에 따라 변역變易함이 바로 항상하는 도道다. 故 恒 非一定之謂也 一定則不能恒矣 唯隨時變易 乃常道也


노자의 상도와 통한다.


항상 변화하는 만물의 생성 원리는 형상화할 수도, 개념화할 수도 없다.

그래서 를 언어의 좁은 공간에 박제해 집어넣으면 더 이상 가 아니라는 얘기다.

도道라는 표현조차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임시로 사용하는 가상의 기호다.


도는 말로 안 된다.




생각과 느낌을 말이라는 매체로 변환하는 작업은 어렵고 한계가 있다.

생각은 말하여지는 순간 틀에 갇히고 유연성과 포용력을 잃는다.

몸짓과 표정으로 말을 보완해 보지만 어설프면 더 헷갈리게 만든다.


말하는 사람은 전달하기 편하게 생각을 각 잡아서 말이라는 상자에 접어 넣는다.

듣는 이는 접수한 상자를 풀어헤쳐 생각을 조립한다.

유통 과정에서 원래의 생각은 유실되고, 훼손되고, 뒤틀리고, 깨진다.


말을 듣고 완성한 생각의 몽타주는 실물과 다른 괴물이 될 수도 있다.

'오해다', '와전되었다' 따위로 변명해 봐야 말은 낙장 불입이다. 취소나 반품이 불가하다.


말과 생각이 따로 노는 사람도 있다.

말에 도취되어 맘에 없는 말을 하면서 살롱을 떠는가 하면

말만 번지르르하게 앞세운다.

공자는 논어에서 남의 환심을 사기 위해 거짓으로 말을 꾸미는 교언영색 巧言令色을 두 번이나 경고했다.


생각이 존재라는 명제를 이끌어낸 철학자가 있는 반면,

말은 후천적으로 학습된 기능이다.

말은 생각과 게임이 안 된다. 


언어는 빈곤하고 열등하다. 그리고 위험하다.




말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라고 한다.


인간이 통신을 말에 의존할수록 말의 가치는 떨어진다.

'말도 안 된다'라고 할 때 '말'은 본래 가치의 말이다.

이제 말은 기록되고, 서명되고, 녹취되어야지 신뢰받는다.


돈 가치를 회복하려고 돈줄을 막아 인플레를 잡는다.

말을 줄이면 그 가치를 되찾을 수 있을까?


다른 동물들은 비언어 통신을 한다고 한다.

사람도 처음엔 여러 가지 수단으로 송수신했으리라.


진정성을 전하는 수단은 말 이외에도 많다.

우리가 말을 줄이면,

퇴화된 동물적 통신 감각이 살아나지 않을까.

그러면 세상도 조용해질 것 같다. 나는 오늘도 말이 많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느 노숙자의 죽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