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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Dec 16. 2021

어느 노숙자의 죽음

독서록 : 도쿄 우에노 스테이션


책: 도쿄 우에노 스테이션 , 유미리 작 / 강방화 역


내가 속한 독서 동아리에서 함께 읽고 이야기한 내용을 요약한다.


78 페이지


서울 시내를 여행하는 이방인에게 지하철 노선, 정거장 그리고 출구 번호를 알려주면 길을 놓칠 수가 없다. 하지만 가르쳐준 출구 번호를 간과하는 이들은 한참 헤맨다.


소설 '도쿄 우에노 스테이션'의 원 제목은 '우에노 역 공원 출구JR上野駅公園口'이다. 수많은 열차 노선이 교차하는 우에노 역의 한 출구 지역에서 노숙하는 주인공의 삶과 그 삶이 출구에 도달할 때까지의 이야기다.


나와 천황 황후 양 폐하 사이를 갈라놓은 것은 고작 줄 하나다.
172 페이지


소설은 시종 삶과 죽음, 천황과 노숙자라는 양 극단을 선명하게 대비시킨다. 

도저히 접점이 없을 것 같은 두 극단은 묘하게도 줄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만난다.


'한 번도 일하지 않고 도전하지 않은 천황'의 시선을 배려한 당국에 의해, 

'언제나 쫓기고 피곤한' 노숙자들은 '특별 청소'의 대상이 된다.


군중은 화려한 상류 사회에 열광하지만 사회의 그늘에 가려진 존재를 배려하는 시선은 부재하다.


사회에서 (자발적으로) 격리되고 가족과 소원해진 주인공은 존재의 이유를 상실하고 자살이라는 '출구'를 선택한다. 자기 존재를 물리적으로 소멸시킴으로써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인정받으려는 역설을 넘겨짚게 한다


주인공은 기복이 많은 신산한 삶을 이어가지만, 사회에 대한 적개심은 없다. 자기 아들의 이름에 황태자 아들의 이름자를 따서 붙였다. 쓸개도 없냐?


인생이란 첫 페이지를 넘기면 다음 페이지가 나오고 그렇게 차례로 넘기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르는 한 권의 책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인생은 책 속의 이야기하고는 전혀 달랐다. 글자들이 늘어서 있고 쪽수가 매겨져 있어도 줄거리가 없다. 끝이 있는데도 끝나지 않는다.
10 페이지


소설에서 주인공의 아들과 동료 노숙자의 죽음을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정작 주인공의 죽음은 슬쩍슬쩍 암시만 하고 지나가며 여운을 남겼다. 우리 독서 모임에서는 주인공 가즈의 자살에 대해 장시간을 할애했다.


. 왜 하늘은 살려고 노력하는 선한 사람에게 고통을 주나, 천도는 있나? 불행이 겹치는 주인공이 노숙자가 되고 죽음을 택하는 상황이 몹시 안타깝고 슬프다. 하지만 내가 옆에 있더라도 무슨 말로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남의 신세 안 지는 일본 사람의 습성, 사람과 소통하는데 서툰 주인공이 시달렸을 소외감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몰아넣은 것 같다. 천황도 종교도 구제하지 못했다. 사는 것에 꼭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강박이 우리 사회 각층에서 자살을 부추기고 있다.


. 노숙자는 '구덩이'가 아닌 '절벽'에 매달린 존재들이다. 남의 도움 없인 헤어날 수 없는, '죽음 자체가 겁나는 게 아니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삶을 연속하는 게 절망적인' 사람들에 대한 사회의 책임을 통감한다.


남의 불행에 관심이 없으면 그 불행이 나에게 돌아온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ㄷ. 주인공이 불행한 삶을 살기는 했지만 목숨을 끊을 만큼 절박한 상황은 아니었다. 노숙도, 죽음도 선택의 결과다. 적극적으로 살다 적극적으로 죽었다는 얘기다.


말기 암 환자가 모든 치료 수단을 동원해서 끝까지 버티다 갈 수도 있지만, 의미 없는 연명 치료를 스스로 중단하고 주도적으로 생生을 마감하기도 한다.


삶을 있는 대로 닥닥 긁어 소진하고 나서 비루하게 죽음에 끌려가든, 흔들리지 않는 참 나로서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하든, 남은 자들이 섣불리 따질 일은 아니다. 살아 있는 게 반드시 성공이 아니듯이 죽음이 곧 실패는 아니기 때문이다. '산 채로 이승에서 부패' 하느니 '왕생往生'을 믿었다면 도피라기보다 이동이다.

왕생 往生: 가서 다시 태어남


자살을 미화해서도 안되지만 꼭 죄악시할 필요도 없다.

깨어있는 명료한 의식으로 결정한 자살은 자유 죽음이다.

밥을 남기면 죄로 간다고 해서 억지로 먹어치우는 건 미련하다. 몸은 음식물 쓰레기통이 아니다.


임종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 인간의 가장 잘못된 습성입니다. 좋은 임종이었는지 안 좋은 임종이었는지를 남겨진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어떤 죽음이 좋은 죽음이고 어떤 죽음이 안 좋은 죽음인지를 모두 자기가 판단하게 됩니다.

중략

남겨진 아들딸들은 꼭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부모님은 정말 훌륭하시다. 아무에게도 피해를 안 주고 정토로 가셨다.

78-79 페이지


스물한 살짜리 주인공 아들 장례식에서 독경을 하던 주지 스님이 죽음에 대해 남은 자들이 이러쿵저러쿵해서는 안된다고 하며 한 말이다.


참척을 당한 어미의 애끓는 심정은 절대 슬픔이지만, 지아비의 죽음 앞에서 '나는 어쩌라고.. '하는 통곡엔 남겨진 자가 '독박'쓸 고통을 원망하는 생계형 슬픔이 섞여있다.


복을 누리고 오래 살다 죽었으니 호상好喪이고, 부모보다 먼저 죽었다고 악상惡喪이라고 하는 건 모두 남은 자들의 자의적 판단이다. 삶을 가지고 죽음에 등급을 매기는 건 온당치 않다.




신분에 의한 억압과 차별을 금지하는 민주국가에 살고 있지만 재산, 교육, 직업, 주택, 명성으로 가르는 사회 계층 간 차별을 경험하고 있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상대적으로 소외계층 疏外階層의 그늘은 더욱 진해진다. 가난하고 늙고 장애가 있는 취약계층은 문화와 정보에서 소외되고 다른 구성원들이 일반적으로 누리는 기회, 혜택을 체계적으로 박탈당한다. 비대면 시대인 지금 더하다.


노숙은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가족으로부터 거절당한 소외계층이 선택하는 주거 방식의 하나다. 사회와 소통을 회피하고 자발적으로 고립되는 것이다. 기초 생활 보장만으로는 이들을 다시 사회에 통합시키는데 한계가 있다. 개인이 온전하게 자신의 인격을 발현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해주어야 한다. 정부 시장에만 맡겨놓을 수 없다. 당사자인 사회가 나서야 한다.


소외계층을 배려하며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작업은 단순한 선행이 아니다. 작은 것을 덜어내어喪 큰 잃음大失을 막는 현명한 사회적 투자다. 덜어냄喪은 계산된 잃음失이다. 지금이 바로 '덜고 비워야' 할 그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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