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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Oct 20. 2022

[산청] 남명 조식 축제에서 트롯가수 팬덤을 체험하다.

산청에서 만난 사람들

10월엔 지역 축제가 많다.


산청군 시천면 덕산의 남명 조식 유적지에서는 남명 선비 문화 축제가 열렸다.


'조선의 대표적 유학자이자 청렴결백한 선비 정신을 실천한 남명 선생을 기리고 전통 선비 문화를 재조명한다'라는 축제 취지가 주최 측의 홍보 자료에 나와 있다. 조식 선생은 환갑 이후 산청 덕산에 자리 잡고 십여 년 동안 후학을 양성하다 돌아가셨다.


축제는 남명 유적지에서 규모가 제일 큰 한국 선비문화연구원 앞 뜰에 설치한 무대에서 진행되었다. 오전 10시도 안 되었는데 평소 한산하던 연구원 앞 양쪽 갓길에 차가 길게 꼬리를 물고 주차해있고 해병 전우회도 분주하다. 연구원의 잔디 광장에선 축제 3대 요소의 하나인 향토 먹거리 천막이 올라가고 있고.


남명 제례 / 산청군 시천면 한국 선비문화연구원


무대 한편에서 연주하는 의젓한 문묘제례악이 깔리면서 남명 선생을 추모하는 제례祭禮 의식이 봉행되었다. 제관의 구령(=사회)에 맞추어 도포를 차려입고 유건儒巾을 쓴 참사자參祀者들이 신분 위계에 따라 초헌 아헌 종헌을 올렸다. 아직 관객석엔 자리를 찜하고 모셔 놓은 가방이 사람 수보다 많아 보이는데, 제례가 끝나면 바로 이어질 개막식에서 호명될 내빈들은 객석의 맨 앞줄을 지키고 앉아 있었다.


축제는 축사로 시작해서 가수 공연으로 끝난다. 내빈 소개의 지루함을 버텨내면 초청 가수 공연으로 보상받는 공평한 비즈니스 모델이다. 개막식 다음에 마당극이 시작되자 객석이 스멀스멀 채워지면서 옷과 모자, 마스크 심지어 손에 든 풍선과 양 우산까지 한 가지 색깔로 통일한 무리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유니폼 로고와 들고 있는 피켓을 보고 오늘 공연할 어느 가수의 팬들이라는 걸 눈치챘다. 인기 가수라서 이곳 산청에도 팬들이 많구나.(하고 잠시 오해했다.)


아직 가수 공연이 두 시간이나 남았는데 '내 마음속 최고', '우주 최강' 같은 구호 피켓을 들거나 옷에 붙인 팬들이 관객석 사이를 바쁘게 움직였다. 열광 팬들이 자리를 못 잡고 헤매는 모양이 안쓰러워 나는 때가 되면 자리를 양보하고 일어설 착한 생각까지 했다.


무대는 마당극에서 국악으로 이어졌다. 국악 연주단의 이름이 좀 수상하다 했는데 역시 복장과 율동이 치어리더처럼 현란하다. 요새는 국악도 저래야지 멕히는구나. 창唱은 구성진 전통 가락 그대로여서 맘이 좀 놓였지만.


초청 가수 공연 시간이 다가오면서 연두색 팬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현장에서 불어내는 풍선과 응원 도구들을 일반 관객들에게 연신 날랐다. 바로 옆자리에 앉은 팬도 동료들의 풍선 배분을 도왔는데 정작 내게는 건네지 않는다. 필시 나의 비우호적인 표정 때문이리라. 늙어가면서 나의 우울한 원판이 주위에 잘못된 신호를 보내는 빈도가 늘고 있다는 억울한 진실을 알고 있다.


가수 공연이 시작될 때쯤 되니 좌석을 압도한 연두색 팬들이 일어나서 무대 앞쪽 좌석들을 노인들에게 권하고 뒤쪽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팬들의 나이도 적어 보이지 않는데.


수십 년 만에 대중 가수 공연 실황을 '직관'하면서 궁금한 게 많아졌다. 옆자리의 연두색 팬을 향해 '당신들 활동에 적극 공감한다'라는 긍정적인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말을 붙였다.


"000 팬들이시군요. 공연 시작하는데 왜 뒤로 들 가나요? " 내가 000 가수 이름을 신문에서 몇 번 본 정도에다 노래는 들어본 적이 없다는 (이들에게는) '세상에 이런 일이' 급의 충격적 사실을 들키지 않게 어휘를 신중하게 선택했다.


"주민들에게 000 잘 보이는 자리를 양보하는 거지요." 팬이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한다.


'주민'이라는 말에 되물었다. "아니 산청 사는 분들 아니세요? "


"우린 전국 각지에서 모였어요, 전 서울에서 버스 대절해서 왔고요. 여기 끝나면 곧바로 예산으로 이동해요." 000 가수가 이따 저녁때 예산 축제에도 출연한단다. 가수와 팬의 동선이 같다. 새벽 7시에 나왔는데 오늘은 자정 넘어야 집에 들어갈 것 같다고 하는데 싫은 기색이 아니다.


"대단들 하십니다." 추임새를 넣으니 경계심이 풀린듯하다.


"아유 이 정도는 약과예요. 지난주엔 비 오는데 5시간이나 꼬박 서서 공연을 기다렸어요." 대화가 풍성해지며 000의 칭찬과 걱정이 수시로 교차한다. 스마트폰을 보여주는데 가수의 사진과 공연 일정이 빽빽하게 입력되어 있다. 주로 50-60대의 여성이 중심이 되어서 울산, 인천, 대전 가리지 않고 전국구로 뛰고 있다고 했다.





특별한 관심사와 동기를 공유하며 연대하는 적지 않은 수의 팬들의 움직임이 매끄럽다.  대충 눈빛과 손짓으로 소통하는데 일사불란하지는 않지만 한두 번 맞춰 본 장단이 아니다.


항상 그렇듯이 초청 가수 세 명 중 000이 제일 나중에 나왔다. 동종 업계끼리의 유대감인지 연두색 팬들은 다른 가수가  공연할 때도 한눈팔지 않고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자기들의 영웅을 기다렸다. 가수 별로 응원하는 팬의 복장 색깔도 빠삭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쪽 가장자리에 다른 가수를 응원하는 소수의 핑크빛 팬들이 웅숭거리고 모여있었다.


'방탄소년단의 노래가 채워주는 에너지가 있다, 다시 일어설 용기를 갖게 되었다.'라는 BTS의 어느 외국인 팬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방탄소년단의 메시지는 기성세대가 이해하기 힘든 전 지구적으로 청년 세대가 처한 어려움에 닿아 있다.


여기 연두색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신들에게 대체 불가한 위안을 제공한 000은 그들에게 은인이다. '은인'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전국을 순회하는 것일 수도 있다. 생소한 데 가서 공연하는 '우리' 000이 혹시 낯설어할까 봐 현장에서 격려해 준다.


단순히 팬이 스타를 동경하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수평적인 유대감을 바탕으로 서로에게 노래와 응원으로서 위로를 주고받는 심리적 공생관계가 성립된다. 자연히 팬들은 공연의 소비자이자 조력자로서 가수의 평판에 해가 되지 않도록 자신들의 행동을 절제하는 성숙한 공연 문화를 견인한다.


가수보다 나이가 서너 배 많은 팬들이 '000 오빠' 피켓을 들고 있다. 동경심, 고마움, 동료애, 모성애 등이 섞여 있는 복합적인 감정을 굳이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들의 경험을 공감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순수한 팬덤을 조롱하는 언사는 타인의 종교를 비난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고 도발적이다. 사는 재미를 주고 인생을 되찾게 해 준 스타를 건드리면 격앙한다.


오래전 클리프 리처드가 왔을 때 세종문화회관에서 여자 팬이 기절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국내에 본격적인 연예인 팬덤(워너비 Wannabe) 이 형성된 건 1980년대 조용필의 '오빠부대'부터라고 한다. 그 후 팬클럽들이 음악 소비자 운동으로 행동하고 팬덤이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팬들 역시 그들과 공감하지 않는 대중도 존중해야 한다. 언젠가 서울시에서 주관하는 줌 강의를 듣는 중에 강사가 트롯 가수 김 아무개 모르는 사람 있냐고 해서 손들었다가 외계인 취급받은 적이 있다. 그 얘기를 친구에게 하며 역성을 청했더니 내가 욕먹어 싸다고 되레 질타하더라.


000 바로 전 순서에서 나이 지긋한 가수가 노래를 마무리하는 참인데 객석에서 와하는 함성이 터져 나온다. 무대 밑에 막 등장한 000에게 보내는 환호였다. 대충 노래를 마치고 무대를 내려오는 가수 보기가 민망했다. 잘 기다린 연두색 팬 중 일부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나 보다.




축제의 꽃이 초청 가수 공연이라고들 한다. 초청하는 가수들의 위상에 따라 축제의 흥행이 좌우된다는 말까지 있다.


지역 주민들이 평소에 보기 어려운 연예인을 무대에 올리고 참가자를 유인하는 전략은 부정적이지 않다. 그러나 축제의 무게 중심이 초청 가수 공연에 과도하게 치우쳐서 주객이 전도되고 행사의 취지가 실종되면 어떡하나 하는 노파심이 생겼다.


지자체의 여행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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