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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Oct 24. 2022

[산청] '원지 같은'

산청  이야기 


지리산의 정상 천왕봉에 이르는 최단 산행 구간은 중산리 매표소(지금은 표 안 판다.)에서 시작해서 법계사를 거쳐 오르는 5.4 킬로미터의 가파른 코스다. 수도권에서 중산리로 가려면 대개 진주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가다 원지에서 내려 버스나 택시로 갈아타고 들어간다. 요즘은 주말에 한해 서울에서 중산리까지 한 번에 가는 심야 버스 편이 생겼다.


원지 시외버스 정류소는 하루 평균 2000여 명이 이용하고 570회에 걸쳐 버스가 다닌다고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람들의 왕래가 많으면 저자(시장)의 기능도 함께 하면서 상업 중심지로서 도읍都邑이 생겨난다. 원지도 지명도에 걸맞게 적어도 읍은 되는 줄 알았는데 와서 보니 행정구역의 말단인 리里에도 그 이름을 못 올렸다. 산청군 신안면 하정리 밑에 자연마을 중에 하나란다. 조직에서 이용만 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친구 같은 생각이 들면서 객쩍게 정의감이 고개를 처 들었다.


신안면 면사무소를 찾아갔다. 민원 창구에 가서 어떻게 행정구역에 원지라는 지명이 없냐고 물으니 부면장 하고 얘기해 보란다. 부면장은 외부에서 회의 중. 다시 오겠다니까 전화번호를 적어준다. 식전 댓바람에 관청에 나타나서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시비를 거는 진상을 너그러운 해결사 부면장에게 패스했으리라 짐작한다.


부면장에게 전화를 거니 원지는 리 단위 이하의 자연마을로 편의상 원지 1구에서 5 구로 나누어 관리하고 있다는 것과 원지의 경계는 확실하지 않지만 대략 신안면 인구의 60%가 원지 사람일 거라고 자상하게 알려준다. 그리고 원지院旨라는 지명은 조선시대에 관원이 공무로 다닐 때에 숙식을 제공하던 원院에서 유래했다는 것까지.


이곳을 오가는 대다수의 사람들과 교통수단이 사용하는 지명과 행정(구역의) 지명이 따로 노는 건 여전히 납득이 안 간다. 버스 타고 갈 땐 원지, 편지 부칠 땐 신안면인 셈이다.


구글지도

추측건대,


원지는 원院에서 유래했다고 했다. 조선시대 진주목은 전국 20목牧 중 하나로 경상도에서 유력한 지방 거점 도시 중 하나였다. 


원지는 서울에서 진주를 통과하는 직선상에 위치한 교통 요충 지점地點이다. 점點은 기하학적으로 위치만 있고 부분이 없다. 면적이 없다는 얘기다. 지점과 지점을 연결하는 도로도 마찬가지다.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지점과 도로에 유동인구는 있어도 거주 인구가 없고, 거주자가 없으므로 행정구역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도로에는 권력자도 없다. ( 예전엔 권력의 공백을 산적이 메꿔줬다.) 테헤란로 장, 을지로 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원지는 태생적으로 도로명 주소 개념의 교통정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행정구역은 다스리기 위해 구획한 단위다. 시, 군, 구, 읍, 면, 동, 리처럼 거주자와 면적에 따라 단위의 위계가 결정된다. 피지배자의 정체성은 거주자다. 독재국가에서 거주 이전의 자유를 통제하는 이유다. 마트에 가면 포인트 카드를 물어보지만 경찰서에선 주민증부터 확인한다. 주민증은 거주를 증명하는 문서다. 구속영장 실질 심사에서도 주거가 부정하면 불리하다. 여기서 신안면은 권력이 통제 가능한, 거주자가 확보된 행정단위가 된다.


조치원이나 이태원처럼 원院으로 시작해서 읍이나 동 같은 행정구역이 된 경우가 많다. 원지는 초심을 잃지 않고 부분이 아닌 위치로서, 행정이 아닌 생활 지명을 고집하며 시외버스 정류소와 마트 이름 교통 표지판 그리고 도로명에 남아 있다.


산청 군내버스 정류장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원지 시외버스 정류소의 아치형 간판에 '산청'이 붙어 '산청 원지 버스 정류소'가 되었다. 원지를 행정 단위로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원지의 브랜드 가치엔 편승하고픈 이율배반적인 심정은 짐작하지만, 이용자를 교란시키는 신호다. 산청군 안에서 교통 정보로서의 '산청'은 산청읍을 가리킨다.


세상에 이런 일이 많다. '원지 같은'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는 실없는 상상을 한다.



다음 글에서 원지 이야기 계속합니다.


지자체의 여행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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