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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Aug 16. 2023

지네한테 물린 얘기

영월에서


https://www.scientificamerican.com/



한참만에 시골집에 내려오니 마당에 잡초가 무성하다. 정글을 헤치고 현관문을 밀었다.


아내가 욕실을 들여다보며 벌레 뭐라고 하는데 못 들은 체하고 버텼다. 그러나 2인 공동운명체에서 저 쪽이 밀어낸 문제를 내가 외면한다고 자연 소멸되는 행운은 거의 없다. 두 번째 경고에 마지못해 가보니 등에 윤기가 반들반들한 지네 한 마리가 욕조 바닥의 타원형 가장자리를 무한히 돌고 있다. 그들의 평소 느릿한 걸음을 고려하면 상당히 당혹한 몸짓이다.


20 센티는 ( 허풍 할인 후 15 센티 ) 좋이 넘는 건장한 지네가 빈 욕조에 몸을 담그려고 들어갔을 리는 없고 욕조 바닥으로 운동 삼아 하강 연습하다 갇힌 듯하다. 지네가 아무리 발(또는 다리)이 많아도 욕조의 직벽이 매끄러워 접지력이 무용하고, (장비도 없지만) 확보물을 걸만한 돌출부나 틈새도 없다. 밑에서 그저 탑돌이나 하면서 부처님의 가피를 빌고 있었을까.


평소 바퀴벌레 처리하는 방식으로 손에 휴지를 몇 겹 말아 들고 집어 올리려다 문득 지네 독毒이 켕겼다. 이 지네는 몸체가 길어 손으로 잡아도 옆으로 삐져나와 측면을 공격할 위험이 있다. 욕실에 널려있는 고무장갑들 중에 병원에서 쓰는 것 같은 니트릴 장갑 한쪽을 꼈다. 손놀림을 자유롭게 하려고 좀 얇은 걸로 방탄을 도모한 것이 실책이었다.


화장실 변기에 버리려다 개체가 하도 소담스러워서 현관으로 향했다. 우리한테 피해 준 것도 없는 이 미물을 주거 침입죄 하나로 극형에 처하는 건 모질다. 문만 열면 풀밭이다, 지네를 식구의 품으로 돌려보내 그들을 기쁘게 해 주자. 방생을 해서 후대에 대복을 받을 심산까지는 아니었고.


슬리퍼를 신는데 아내가 싱크대에서 돌아서며 소리친다, 화장실로 안 가고 뭐 하냐고.


아내가 뭐라 하면 일단 따르고 보는 기제는 경험을 통해 학습된 자연선택의 결과다. 혹시 결과가 안 좋아도 내 책임 아니라는 노예근성도 작용한다. 거기다가 나는 큰소리치는 사람에게 자동적으로 순응하는 용렬 맞은 심성이 있다. 지네를 쥐고 있는 이 긴박한 상황에서 두 프로그램이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돌아간다.


현관문을 열다가 돌아서서 화장실로 향하는 순간, 지네를 잡고 있던 오른손 등이 따끔했다. 지네가 오버헤드 킥으로 고무장갑을 뚫고 나를 공격한 것이다. 장갑을 벗으니 쏘인 부위가 금세 벌게지면서 붓는데, 저 인간은 뭐만 시키면 사고 친다는 한심스런 표정으로 아내가 바라보고 있다. 조직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원인을 파악하기보다는 문제를 일으킨 가책자부터 추궁하는 상사가 있다.


이러다가 오른팔이 마비되는 게 아닌가 겁이 나는데 아내는 차분하게 인터넷에서 '지네 물림'을 검색하고 있었다. 쏘인 데를 물로 잘 씻어주면 길어야 48시간 안에 가라앉는단다.


와중에 문제의 지네는 사라져 버렸다, 집안으로 다시 들어왔는지 문밖으로 기어나갔는지.


지네는 내가 문 쪽으로 갈 때까지는 내 검지와 엄지 사이에서 다소곳이 있다가 화장실로 방향을 바꾸는 순간 반항하고 필사적으로 반격했다. 아내가 외치는 소리를 들었든지 아니면 내가 진행 방향을 전환할 때 지네의 고유한 방식으로 교차하는 자신의 운명을 감지했을 터이다. 


우리가 모를 뿐이지 모든 생물은 나름대로 통신하고 감지하는 수단이 있다고 믿는다. 인간도 말 이외의 다른 수단이 여럿 있었는데 말이 많아지면서 퇴화했을 수도 있다. 말 못 하는 동물이라고 함부로 하는 짓거리는, 영어 능력을 인격과 동일시하는 우리네 요즘 세태와 통한다.


지네는 압도적으로 우월한 인간의 손아귀에 잡힌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정신줄을 놓지 않았다. 시시각각 돌변하는 상황을 판단해서 독침으로 방어하고 민첩한 이동 능력으로 궁지를 벗어났다. ( 미련하지만 ) 말도 안 되게 거대한 적에 맞서서 자신만의 생존전략으로 목숨을 구했다.


인간에 비하여 보잘것없다고 미물이라고들 한다. 크기가 작다고, 말을 못 한다고... 세상사 겉보기만 갖고 판단할 일이 아니다.



지네가 집안에 잠복해 있다가 밤중에 내게 해코지하는 상상을 잠깐 했는데, 따지고 보면 나는 보복의 대상이 아니다. 내 본심을 잘 알고 있을 지네가 불가피하게 내 손등을 공격한 사실을 미안해하며 연말에 문자라도 하나 보내올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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