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도 못 잡고 닭도 못 잡는 경영자

소 잡는 칼도 배워야 닭을 잡는다.

by 영감

소개를 받고 연단에 올라온 연사의 첫마디 ; 1) 지난주 내내 오늘 강연을 준비하면서 가슴이 설렜고, 어젯밤엔 잠을 설치기까지 했다. 떨린다. 또 한 연사 ; 2) 일정이 바쁜데도 저어기 저 사람 (연사를 섭외한 간사를 가리키며) 이 몇 달 전부터 하도 졸라대서 억지로 왔다. 그런데 여기 오늘 어떤 모임이라고 했죠?


위에 든 두 가지 사례는 강연자가 흔히 서두에 하는 말이다. 나는 2) 번이 걸리면 불편해진다. 대개 이름 좀 알려졌다는 연사가 시 건방 떠는 주접인데 제 딴에는 듣는 사람들의 규모와 수준이 좀 아래로 보인다고 까부는 거다.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원래는 이거 삼일 동안 꼬박 해도 빡빡한 분량인데 오늘은 두 시간짜리로 줄여서 어쩌고..' 하면 나는 아예 귀를 닫는다. 되게 바쁜 척하는 사람이 겨우 짬을 내서 / 사흘 동안 들어도 모를 내용을 두 시간 동안에 대충 짚어줄 테니까 / 영광으로 알고 들으라는 얘기를, 감지덕지 앉아서 듣고 있을 만큼 내 시간과 마음이 너그럽지 못하다. 이걸 경영자 버전으로 바꾸어 보자. 얘기는 심각해진다.




'오너가 삼고초려해서 마지못해 왔다. 내가 사실 이런데 올 군번은 아니지만 잘 모시겠다고 하니 해보는데 잘 될지 모르겠다.' 재벌 그룹 계열사 사장 몇 년 하다 어느 제조업체의 '부회장'으로 와서 하는 말이다. 어째 분위기가 위에 사례 2)와 통하지 않은가? 예감이 안 좋다. 자수성가한 이 중소기업의 창업자는 큰 물에서 놀던 전문 경영인을 모셔왔으니 회사를 몇 배 키워줄 걸로 기대하고 있다. 그렇지만 대기업에서 신입사원으로 시작해서 사장까지 올라간 사람의 경쟁력, 또 그로 인한 업적의 상당 부분은 그 대기업 환경에서만 작동하게 마련이다. 수십 년간 익숙해진 그룹의 인프라 그리고 인적 구성의 온실 안에서 가능했던 성과다. 중소기업에 영입된 대기업 출신 경영자는 조직과 소통하면서 처음부터 다시 배우겠다는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시작하지 않으면 대개 끝이 안 좋다.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 와서 처음에 부딪히는 게 사람이다. 출근 첫날 아침부터 불현듯 전 회사의 부하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도무지 여기 직원들은 외국인만큼이나 말이 안 통한다. 웃기는 얘기를 하면 멀뚱멀뚱 있다가 심각한 얘기를 하는데 웃는다. '애들 수준이 떨어져서 앞으로 같이 일하려면 열 좀 받겠다.'라고 즉시 판단해버리면 그건 자기중심적이고 위험한 편견이다. 문제는 직원의 질이 아니고 경영자의 단선적인 사람 경험이다.


대기업에선 인생의 동선이 시차를 두고 닮은꼴인 선후배가 모여 일한다. 이와 달리 중소기업엔 다양한 배경의 구성원들이 섞여 일한다. '아'하기도 전에 '어'하는 대기업 직원들의 민첩한 팀워크 대신에, 한 사람이 여러 역할을 해내면서도 옆 사람을 돕는 진중한 동료애가 중소기업 직원들에겐 깔려있다. 회사는 을이고 자신은 병도 안 되는 처지를 특유의 인내심으로 극복한다. 알고 보니 회사 도처에 창업 동지들이 티 내지 않고 묵묵히 앉아 있다. 그들은 오너 못지않은 소명의식을 가지고 회사의 명운을 피부로 체감하며 일한다. 큰 회사에선 구경조차도 힘든 역사의 증인들이다.




대기업 출신을 앉혀 놨으니 중소기업 정도는 거저먹기로 굴러갈 거라는 생각은 순진하고도 어리석다.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축소판이 아니라 다른 얼개를 가진 조직이다. 작동 원리도 달라 많이 쓰는 경영자의 '근육'이 다르다. 회장이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덜컥 꽂아 논 용병 경영자는 사람 말고도 여기저기에서 장애물을 발견한다.


일 년 내내 죽으라고 팔아봐야 왕년에 한 달 매출 거리도 안되는데 걸리적거리는 건 이리 많은 지. 대기업에 있을 적엔 직원들 월급 줄 돈이 모자라 여기저기 뛰어다닌 기억이 없다. 여기선 여차하면 자기 아파트까지 담보로 내놔야 한다. 그룹 법무실에 넘기고 잊어버리면 되었던 계약서도 직접 챙겨야 한다. 저조한 성과에 초조한 나머지 아끼던 전관예우 카드를 꺼내보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다. 나중을 생각해서 좀 남겨놓아야 한다.


중소기업에게는 을이 없다는 것도 대기업 출신이 겪는 어려움이다. 대기업에선 납품일자에 조금이라고 차질이 생기면 하청업체 대표가 들어와 죽여주십쇼 했는데 여기는 공장 생산라인이 서있는데도 부품업체가 연락도 잘 안된다. 힘이 아닌 대화와 전략으로 업체들과 타협해서 공장을 다시 돌려야 되는데 옛날 생각하면 속만 부글부글 끓는다.


대기업에선 중역이 뭘 지시하고 끌고 가는 게 아니라, 각 부서가 올린 사업들을 심사해서 추리고 혹 서로 충돌하는 기능들이 있으면 조정을 해준다. 여기 중소기업은 부르기 전엔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 뭔가 직접 나서서 끌고 가려니까 이젠 인적 자원이 못 미친다. 교육도 시켜야 한다.


잘 되는 회사의 경영자는 알고 봤더니 대부분이 내부에서 승진한 수더분한 사람들이더라고...
Good to Great 짐 콜린스


높은 연봉을 받고 등판한 스타는 이전 팀에서 올린 성과를 재현하기 위해 '요령은 전과 동'으로 밀어붙인다. 그 과정에서 고개를 갸우뚱하는 원로는 제거된다. 그러나 팬들을 즐겁게 해주고 싶은 조바심에, 잘 아는 흘러간 노래 몇 곡 부르고 내려와 공 술 마시려다 그만 망신당한다. 경솔하게 들이민 정책으로 망가진 회사를 돌이키는 데는 막대한 자원과 시간이 투입된다. 경영자 연봉은 그에 비하면 껌 값이다.


소박한 데서 대우받으며 어영부영 세월 보내려던 부회장은 피곤해지기 시작한다. 회사 안에 허심탄회하게 얘기할 사람이 없으니 밖으로만 돈다. 경영은 뒷전이다. 옛날 동료들을 불러 회삿돈으로 술 사주며 회사 흉보기 바쁘다. 결론은, '여기는 수준이 떨어져서 내 실력 발휘가 안된다' 다. '우리 회사'보다는 '여기'가 자연스럽다. 머지않아 '거기'가 되겠지.




대기업 임원을 데려오기 전에 중소기업주는 그 이유와 기대 효과를 분명하게 밝히는 게 나중에 서로 마음고생을 던다. 그 사람이 대기업에서 관장한 제품의 마케팅 지식이나 시장 개척의 경험이 필요한 건지, 또는 대기업 임원의 인적 네트워크와 출신 대기업의 전관예우를 노린 건지를 서로 이해하고 결정하는 게 안전하다. 이런 사전 통신을 게을리하면 대기업 출신은 자기가 여기 앉아 있는 것 만으로 큰 도움이 된다고 오해할 수 있다. 자기 방에 앉아서 왜 아무도 안 오지 하면서 무얼 해야 할지 도 모른 채 시간만 보낸다.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의 임원을 통해서 대기업의 시스템을 복제해서 회사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고 싶다면 한 사람 데려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시스템이 그냥 이리저리 그려놓은 조직도가 아니다. 아무튼 위에 있는 걸 다 충족하는 사람은 없다는 걸 명심하는 게 좋다.



부자완이 이소 왈 할계언용우도 夫子莞爾而笑曰 割鷄에 焉用牛刀
공자께서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닭잡는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느냐 ?'
논어 양화편陽貨篇 /낭송 논어 ( 김수경외)


우도할계牛刀割鷄는 소 잡는 칼로 고작 닭이나 잡는 비효율을 풍자한 말이지만, 소 잡는 칼이라고 해서 닭을 척척 잡는 것도 아니다. 닭은 닭 잡는 칼로 잡아야 한다. 자기가 소를 잘 잡는 칼이어도 스스로 닭 잡는 칼로 변신해야 한다. 사실은 소도 닭도 못 잡는 엉터리 칼인 경우가 허다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