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업
어느 조직이든 누가 새로 들어오면 긴장이 형성된다. 자대에 배치된 이등병은 내무반 고참들 앞에서 고된 신고식을 치루지만 갓 임관해서 전입 온 새파란 소위는 위병소 (부대 정문)에서 부터 사병의 군기를 잡는다. 서로 조직에 적응하는 과정인데 많은 썰이 돌아다닌다. 관리자가 새로 맡은 조직을 장악하기 위해 몇 명을 시범 케이스로 혼낸다는지 반대로 유화책을 써서 구성원들의 환심을 사거나 한다. 심지어는 신혼부부까지도 처음에 남편을 잘 길들여야 한다느니 마누라한테 한번 쥐이면 평생 끌려 다닌다 하며 초기 전략을 고민한다.
환영받지 못하는 관리자로서, 그것도 객지에서, 경험도 없이 회사를 경영하는 마당에 조직의 장악은 사치였다. 우선 손익 분기점 (break-even point)까지 매출을 끌어올리는 게 관건인데 내가 현지 유통에 어두우니 영업 책임자에게만 의존했다. 돌아오는 건 광고 투자나 외상 거래를 늘리는 (내게는) 좀 허황하고 위험한 제안뿐이었다. 그걸 가지고 앉아서 논쟁하다 보면 말과 논리가 딸리는 내가 번번이 졌다.
우리 법인은 북구를 포함한 서유럽 전체에 제품을 공급했는데 네덜란드에 사무실을 둔 건 물류 인프라가 잘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물류산업은 지금도 네덜란드 국가전략산업의 하나다. 나라 별로 대리점을 운영했는데 해달라는 거만 많고 매출은 제자리였다. 그래서 시작한 게 헝가리, 폴란드 같은 동유럽 지역 개척이었고 내가 직접 맡았다. 할 줄 아는 게 몸으로 뛰는 거라서 차라리 그게 속 편했다. 어차피 아무도 안 건드린 황무지였다. 그 지역은 당시 막 체제가 바뀌는 와중에 사회가 혼란스러워서 영업자들이 선뜻 나서려 하지도 않았다. 본사 근무할 때 동료 직원이 출장 갔다 와서 작성한 동유럽 시장 보고서를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었다. 처음 거래를 열기까지 시간은 걸렸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잠재 수요는 상당했다.
독일 하노버에서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컴퓨터 관련 CeBit 전시회는 새로운 거래선을 잡는데 아주 유용했다. 우리는 매년 전시 부스를 차려놓고 참가했다. 낮에는 방귀를 뽕뽕 뀌며 부스의 상담실을 누비고 저녁땐 본사에서 출장 온 직원들 도와주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할 만했다. 유사한 미국 전시회인 라스베이거스 COMDEX에 비해 기간도 길고 운영시간도 길었다. 그래서 전시회 마지막 날 오후가 되면 다들 전시 제품들을 철거하고 '좌판 접는' 분위기로 들어갔다. 그러나 우리는 끝나는 6시까지 꼼짝하지 않고 전시 부스를 지켰다. 전시 마감시간 직전에 폴란드에서 왔다는 젊은이 몇 명이 들러서 선 채로 객쩍은 질문들을 하다가 갔다. 그 회사가 나중에 우리 법인 최대의 거래처가 되었다.
지금은 CeBit , COMDEX 둘 다 중단했다고 한다. 격세지감을 느낀다.
고객 접대는 생맥주에다 독일식 족발 (schwein haxe)이면 훌륭했다. 새우젓이 없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전시장에 있는 대형 식당 (Münchner halle)에서 거래처 사람들과 저녁을 먹었는데, 폴란드 고객사 젊은 친구 하나가 가방에서 보드카 한 병을 슬며시 꺼내 작은 잔에 따라 홀짝거렸다. 객기가 발동한 내가 술은 그렇게 마시는 게 아니라고 '주의'를 주고, 맥주 1000 cc 한 조끼를 반쯤 마신 후에 보드카 남은 걸 부어서 섞었다. 그러고 나서는 생각이 안 나는데 그 미친 짓의 반응은 뜨거웠다. 그다음 날 모르는 이들이 우리 전시 부스에 들러서는 엊저녁에 참 재미있었다며 내게 인사들을 한 마디씩 하는데 불안해 미칠 지경이었다. 긴 테이블에 올라가서 춤을 추었다나?
소련 위성국가 시절 서방 세계와 왕래가 드물어서 그랬는지 동유럽 고객들은 우리 쪽에 오면 가끔씩 어색한 행동을 했다. 예를 들면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면서 디저트를 먼저 달라고 한다든지... 그러면 웨이터가 한심한 듯 혀를 차며 돌아선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시키는 대로 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식사 후에 가져온 계산서를 들고 나는 한숨을 크게 내리 쉬면서 이마에 손을 얹는다. 웨이터가 당황한다... 건방진 웨이터에 대한 나름대로의 응징이었다. 식당에서 밥 값 내는 쪽이 가끔 연출하는 우리들끼리의 개그라는 걸 식당 웨이터가 몰랐을 뿐이다.
동유럽 국가에서는 (우리나라 비슷하게) 영어를 쓰는 인력이 귀했다. 외국어라고는 러시아어만 하는 꼰대들 보다 영어 몇 마디 중얼거리는 젊은 사람들이 대우받았다. 네덜란드에 물건을 수령하러 온 동유럽의 트럭 운전사들은 당연히 영어를 못했다. 물류센터 직원들이 영어를 못한다고 깔보면 내가 그랬다, 그 사람들이 영어 할 줄 알면 트럭 몰고 여기 안 온다고. 네덜란드 사람들은 영어가 능숙하다. 내가 거기 사는 동안 만난 네덜란드 사람 중에 나보다 영어 못하는 사람은 딱 한 명, 바로 우리를 자문해 주던 로펌의 K 변호사다.
성급하고 감상적인 동유럽 사람들과 정서적으로 동질감은 느꼈지만 거래를 틀 때는 뚝심이 필요했다. 선불 결제가 웬 말이냐며 펄쩍 뛰다가도 끈기 있게 사정을 설명해주면 나중엔 그러려니 했다. 거래처 간에도 일단 철학을 공감하면 서로 소모적인 대화나 절차가 절약된다. 대금 결제 원칙에 한번 예외를 적용해 준 적이 있다. 하루는 헝가리의 고객사 대표가 전세기에 직원들을 잔뜩 태우고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 제너럴 에이비에이션 ( 자가용 비행기 같은 거 타고 내리는 데 )에 내렸다. 대뜸 하는 말이 자기네 회사 자금 사정이 좀 어려우니 신용 (외상) 좀 달라는 거였다. 기가 막혔지만 들어주었다. 그 후 그 회사는 문을 닫았다. 분위기에 밀려 저지른 판단 실수였다. 우리 외상 대금은 말끔히 갚아주고 망했다.
매출이 바쳐 주면서 회사의 손익이 돌아서니 직원들의 마음도 돌아섰다. 한 직원은 내가 주말에 집을 이사할 때 와서 이삿짐까지 날라 주었다. (근데 짜장면은 못 사주었다.) 처음에 조직을 장악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파장을 일으키는 건 전략이 아니라 소란이고 곧 들통나는 연기일 뿐이다. 자기를 도와서 같이 일할 사람들을 애완견처럼 동물적으로 훈련시키는 건 존엄한 인격체임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 봐야 말 잘 듣는 것 이상의 능력은 기대할 수 없다. 가장 확실하게 조직과 융합하는 전략은 몸소 진정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자신이 저 인간을 믿고 이 조직에서 최선을 다 할 것인가 하는 부하 직원의 물음에, 답을 주는 것이 중요하고도 어렵다.
동유럽의 거래처 한 명하고는 아직도 연락을 하고 지낸다. 우리 둘이 서로를 부르는 호칭은 같고 수십 년간 변함이 없다. 'My Big Boss 두목', My에 액센트가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