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는 건배할 때
shit이라고 해요.

상견례

by 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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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ubovlisitsa, 출처 Pixabay



나는 90년 대에, 회사에서 인수한 해외 법인의 책임자로 네덜란드에 파견되었다. 대표를 포함해서 직원 전원이 네덜란드 현지인이었는데 매출은 부진하고 관리비는 높아 적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 년에 근 한 달씩 휴가를 챙기는 현지 직원들에게 한국의 투자자는 도무지 믿음이 안 갔을 터이다. 해외 법인을 원격 조종하는 노하우가 부족했던 당시, 회사는 일단 자기 사람을 하나 '박아' 놓아야 안심이 되었었다.


그렇게 해서 법인 운영의 경험도 없는 미혼의 과장을, 현지 법인 대표와는 사전 협의도 없이 알아서 하라며 떠다밀듯이 내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하지만 그 당시는 온 나라가 수출을 위해서 '안되면 되게 하라' 분위기였으니 그러려니 했다. 도착한 다음 날 현지 대표 H가 내게 무슨 일을 맡을 거냐고 묻길래, 조직도에서 그 사장 바로 밑에 동그라미 치면서 부사장을 맡겠다고 했다. 그리고 전 직원의 사장 결재는 나를 거치게 해달라고 하니 H는 며칠 있다 직원 서너 명을 데리고 그만두었다. 그리고 내가 사장이 되었다, 졸지에.


본사에서는 난리가 났다. 세일즈 조직이 와해되었다느니 미수금은 어떻게 되는 거냐는 등등. 사장이 나가면 거래선도 떨어져 나가고 외상값도 떼이는 그 당시 우리나라 구멍가게식 걱정이었다. 기우였다. 네덜란드는 국토 면적이 우리 경상남북도를 합친 넓이에 불과한 소국이지만 세계 최초의 상업 국가 중의 하나로서 기업 회계 투명성은 유럽에서도 최고 수준이다. 장기 외상매출금은 있어도 누가 횡령한다든가 하는 일은 아주 드물었고, 사장이 옮겨 간다고 고객사까지 따라 이탈할 만큼 '인간적'이지도 않았다.


남아있는 직원들은, 갑자기 들이닥쳐서 자기네 사장을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한 아시아 빈국의 키 작은 남자를 곱게 볼 리가 없었다. 내가 아침마다 직원 조회를 소집하고 애국가를 부를 것이라는 둥, 얼마 안 있어 회사를 정리할 거라는 둥 별별 가짜 뉴스에 솔깃해서 내게 뜨악하게 굴었다. 도착한 다음 날인가 퇴근길에 회사 로비에 있는 스낵바에서 직원 한두 명과 맥주를 마셨다. 건배를 이 나라 말로 뭐라고 하냐 물었더니 '쉿'이라고 한단다.


그 후 한 일주일 있다 직원 회식을 하게 되었다. 공식 환영회인 셈이었는데 묵직하고 오래된 한 고급 식당에서 모였다. 식사에 앞서 내가 건배를 제안하며 '쉬이잇 shit!' 하고 외쳤다, 아주 우렁차게. 식당에 있던 모든 손님 그리고 종업원들이 우리들을 돌아다보았다. 창피함은 우리 직원들의 몫이었다. 나의 네덜란드 살이 5년을 알리는 축포가 되었다. 네덜란드어로 건배는 프로스트 proost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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