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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Mar 11. 2024

'러' 자 돌림 신조어

혼밥러,  댓글러...

© 가을자락

 

'댓글러(댓글을 많이 쓰는 사람'), '오지라퍼(남의 일에 지나치게 참견하는 사람)', '혼밥러(혼자 밥 먹는 사람)'... 인터넷 채팅에서 많이 돌아다니는 '러'자 돌림 신조어들이다. 


특정한 속성을 가졌거나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재미있게 표현하거나 구분하는 데 쓰인다. 


인터넷 신조어라는 것이 한 번 유행을 타면 걷잡을 수 없이 이용 빈도가 늘어서 앞으로 같은 방식으로 만드는 말이 계속 확장될 전망이다. '막말러', '참견러', '취업러', '알바러', '짤방러', '꿀팁러', '투잡러'...


발전하는 사회에서 새로운 의미를 표현하려는 욕구는 자연스러운 추세고, 표현하는 방식 또한 문화 현상이다.  '갑분싸', '단짠', '엄친아' 같은 줄임말은 실시간 대화에서 메시지를 빠르게 입력하고, PC 키보드에 비해 입력이 불편한 스마트폰 자판에 적응하는 꾀라고 할 수 있다. 영어의 'LOL'(폭소), 'OMG(맙소사)' 이에 해당한다.


신조어는 언어가 창의성과 다양성을 통해서 새로운 문화에 대응하는 과정의 일부다. 지금은  활발한 인터넷 통신이 바로 '새로운 문화'인 셈이다. 




신조어는 언어의 색깔을 더해서 의사소통을 재미있고 편리하게 해 주고 사용자 무리 간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공유시키는 순기능이 있다.


하지만 '댓글러' 같은 '러'자 돌림 신조어는 문제가 있다. 


영어에서 'killer' 'designer'처럼 동사에 'er' 어미를 연결해 행위자를 나타내는 모양을 흉내 냈다. 'er' 발음과 비슷한 '어'를 붙여서 사람의 속성을 나타내는 명사를 조립했는데 'ㄹ'로 끝나지 않는 낱말에도 싸잡아서 '러'를 붙이고(예, '혼밥'), 그것도 동사가 아닌 명사 뒤에 달고 있다. 


영어 단어를 섞어 쓰는 풍조에 이어서 이제는 영어 단어의 어미까지 가져다가 말을 만드는 혼종의 단계에 이르렀다.  일본에서는 1990년대부터 유행했다고 한다. 


명사에 '러' 접미사를 붙여서 '하는 사람'이라 표현하는 형식은 영어와 한국어 어느 쪽 문법을 기준해도 정확하지 않다. 문법을 훼손하는 조어는 언어의 일관성과 정확성을 해치고 품위를 떨어뜨린다. 


어차피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속어성 신조어인데 문법까지 따져 가면서 써야 하냐고 저항하거나 유행어에 대한 꼰대들의 문법 나치라고 빈정댈 수 있다. 


그러나 문법은 언어의 안정성과 규칙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소통하는 데 필수적인 기반을 제공한다.


맞춤법이 잘못되거나 문법에 맞지 않는 말을 보고 들으면 실제로 심박수 상승 등 신체적 반응으로 이어지며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영국 버밍엄대 연구팀)




문법은 언어의 기본 틀 역할을 하지만, 시대와 사회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역동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나친 획일성을 지양하고 시대적 요구를 반영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융통성은 필요하다. 하지만 무분별한 변화는 언어의 정체성 상실을 초래한다. 


헌법은 새로운 가치관이나 사회 문제를 반영하여 개정하기도 하지만, 문법을 시대에 따라 마구 손대면 언어가 불안정해지고 과거와의 연결고리가 끊어진다. 우리는 문법을 통해 과거 사람들의 생각과 문화를 이해한다. 문법은 언어의 기본적인 구조와 표현 방식으로서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문화적 유산이기 때문이다.


언어와 마찬가지로 문법의 변천도 자연스러운 언어 사용 과정에서 틀을 유지하면서 이루어져야 한다. 일부 세대의 취향이나 편의에 따른 임의적인 변화는 언어의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기본을 건드리면 곤란하다는 얘기다.


'댓글 다는 사람'이라고 길게 쓰는 우리말 조어법의 제약을 피해서 익살맞고도 간단하게  '댓글러'로 줄였다. 


문법은 어떤 언어가 무수히 많은 다양한 표현을 산출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뼈대가 된다. 고립어인 중국어에 비해 조사와 용언을 활용해서 의사를 전달하는 우리말의 조어력이 취약하다고 변명할 수는 있다.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영어 어미까지 빌려다 쓸 만큼 우리말이 궁색하지 않다. 우리말에서도 어떤 속성을 가진 사람을 간단하게 가리키는 방법은 '쟁이', '꾼', '잽이', '놈', '자' ... 등 다양하다. 


'된장녀', '까도남'은 특정 취향을 가진 남녀를 뜻하는 비속어이기는 해도 문법적 틀을 벗어나지 않는 간단한 신조어다. 


'댓글러', '혼밥러', '막말러''댓글꾼', '혼밥족', '막말남'으로 부른다고 덜 간단하고, 덜 재치 있고, 덜 다양할까? 


우스꽝스러운 '게임러', '해킹러'는 생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기존 영어 '게이머', '해커'와 실속 없이 중첩되어 이해와 소통에 지장을 준다.


'그림러', '글러'보다는 '환쟁이',' 글쟁이'가 같은 속어이지만 덜 헷갈리고 더 익살맞다. 


'취준러', '알바러', '짤방러', '꿀팁러', '투잡러' 따위의 '러'자 돌림이 그저 한동안 유행하다 소멸되기를 기원한다. 그렇지 않고 이런 말들이 생존에 성공해서 (우리 사회의 감시가 전혀 없으므로) 사전에라도 올라간다면 언어의 발전적인 변천이 아닌 퇴보에 해당한다. 


퇴보하는 언어는 없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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