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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Mar 04. 2024

판결문을 반말로 쓰는 이유

공공 안내문도 반말로 작성하자는 얘기

'수신 확인.'


'해당 위치로 이동 중임.'


"교육훈련 종료하겠다고 알림."


군대에서 졸병이 하늘 같은 대대장과 반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무전 교신할 때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적이 감청을 하더라도 아군의 신분을 파악할 수 없게 무전 칠 때는 존대를 못 하게 되어있다. 


철저하게 계급으로 움직이는 군대에서 무전 교신을 평서형으로 하는 주된 이유는 무엇보다 간결한 소통을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작전 중엔 위아래의 예절보다 명확한 상황 보고와 지시가 먼저다. 


무전 교신 지침의 첫 번째 항목이 '명확하고 간결할 것'이다. 


공적인 의견이나 판단을 알리는 문서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판결문을 존댓말로 작성했다고 해서 언론에 보도되었다.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5777061


존댓말 판결문을 시도한 판사는 나라의 주인인 국민한테 판결문을 보내는데 존댓말을 쓰는 게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사법부의 지나치게 권위적인 인식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반응이다.


나는 소송 당사자가 되어 본 적은 없지만 가끔 신문에서 보는 판결문이 '파기하고 환송한다' 든지 '-를 지급하라' 등 다소 딱딱하고 반말체로 끝맺었던 걸 기억한다. 


판결문은 판사가 재판을 수행하고 그 결과를 명시한 공식 문서다. 법률 용어와 복잡한 논리를  '-한다', '-하다' 등의 평서형 어미나 '-하라' 같은 명령어를 사용해서 전달한다. 


평서체 판결문은 명확하고 간결하지만 강압감을 줄 수 있다. 판결문이 반말로 돼 있어서 자기가 죄인 취급받는 느낌이 들었다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인식은 반말과 평어를 혼동하는 데서 기인한다. 존댓말의 반대편에 반말과 평어가 위치해 있어 언뜻 보기에는 양자가 같아 보이지만 차이가 있다. 반말은 위계에 따라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낮추어 쓰는 상대적인 말투인 반면, 평어는 개인적인 감정이나 의견을 담지 않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서술의 방식이다. 


죄인을 규정하는 건 반말이나 존댓말 같은 말투가 아닌 판결문의 권위와 내용이고, 그 권위는 국가가 위임한 권리다. 그리고 판결문의 권위가 소송 당사자에 대한 존중과 충돌하는 개념도 아니다. '국가는 두 가족 중 한 가족 세 명에게 1천2백만 원을 배상하라' 판결문이 국가를 비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소설이나 신문기사 등에서도 존댓말을 쓰지 않는다. 


'소녀는 개울에다 손을 잠그고 물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다.' 황순원의 소나기 앞부분을 읽으면서 고압적이라고 느끼는 독자는 없다. 


만일 법원의 모든 판결문을 존댓말로 쓰면 어떻게 될까?


'피고인을 징역 10년에 처하도록 하겠습니다.'


'피고는 원고에게 1억 원의 손해 배상금 및 연 12%의 이자를 지급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판결문은 법적 명령이므로 명령조 문구는 필수적이다. 명령은 상대방의 즉각적인 행동을 유도하는 것이 목적인 반면, 존대는 상황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바 명령문의 강도와 명확성을 약화시켜 법적 효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 


법 조항이 그렇듯이 법의 일부인 판결문에도 존대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우리 사회에서 실속 없이 점점 길고 복잡해지고 있는 공공 안내문도 평서형으로 바꿀 것을 제안한다.




https://brunch.co.kr/@hhjo/250


승객 여러분 국토교통부의 코로나 일구 방역 강화 방침에 따라 마스크 미착용 승객 탑승 시 운전기사가 승차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차내에서는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하여 주시고 불필요한 대화는 가급적 자제하여 주시기 당부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코로나 시절에 버스에서 듣던 방송인데 마스크 쓰라는 얘기를 하기 전에 목적, 법적 근거 그리고 위반시 불이익 따위로 변죽을 울리는 동안 한 정거장은 그냥 지나간다. 


판결문의 귀퉁이에 '등본입니다'라는 고무도장이 찍혀있다. '등본'에 사족처럼 '입니다'를 달아서 7자로 만들어 놓았다.  


식당의 메뉴판도 '메뉴입니다'로 고쳐 써야 할까? 



'벽에 광고물 붙이지 말 것' 10 글자 정도면 충분할 경고문을  40 자로 늘려놓았다. 


오죽하면 이랬을까 하는 생각도 있지만, '죄송합니다'로 시작해서 '감사합니다'로 끝나는 장문의 호소문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 






'자연생태 공원으로 가려면 차를 타고 가는 게 좋다'라는 취지의 안내문.


'차량', '이용', '추천' 따위의 한자어에다 경어를 지나치게 사용했다. 


'바닥이 얼어서 미끄러우니까 조심하라'는 안내문.


'얼었다'라는 말이 '저렴해' 보였나 보다. '결빙'이라는 좀 있어 보이는 한자어에 까닭을 뜻하는 격조사 '으로'가 어색하게 붙었다. 문법적으로 어수선한 글이 되었다. 



여러 사람에게 알리는 통신은 빠르게 이해해서 쉽게 따를 수 있도록 작성하는 것이 우선인데,  요즘은 공공 언어에 대한 그릇된 인식과 자존감 낮은 문서 작성이 독자의 이성적이고 차분한 독해를 방해하고 있다. 


내용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을 지나치게 걱정해서 취지를 장황하게 늘어놓는다든지,


공문은 한자어를 사용해서 공손하게 써야 한다는 격식 강박 때문에 문장구조가 복잡해져서,


읽는 이의 피로도를 높이고 핵심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효과적인 정보 전달 문화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공공 문서를 평서형으로 바꾸자.


'하세요', '합니다', '하십시오' 등의 경어체를 '할 것', '한다', '하라' 식의 평서형 어미로 바꾸자, 과감하게. 


많은 사람에게 전하는 글에서는 정중함보다 간결함과 공신력이 더 중요한 가치다.


역으로,


개인이 공기관에 제출하는 민원서류나 탄원서도 존대가 아닌 평어로 쓰도록 하면 공문서가 너무 권위적이라는 불만은 자연히 사라질 것이다. 


주민등록증 발급을 신청한다. 
피고인의 유일한 생계수단인 차량 운전이 가능하도록 선처 바람. 


좀 헷갈리면 작전 중 무선 교신 수칙을 참고하자.


무전 교신 지침


               짧고 명확하고 간결할 것             


               산만한 형식주의를 피할 것             


               메시지의 우선순위화             


               임무에 기인한 메시지를 유지             


               복명복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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