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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Mar 25. 2023

우리 사회가 관계 불안증을 앓고 있다

용열맞은 어법


© redjohn45, 출처 Unsplash


앞으로 대중교통에서 마스크를 안 써도 된다고 한다. 삼 년 전 이맘때 마스크 몇 장 사려고 약국 앞에 주민증 들고 줄 서있는데 왜 그렇게 암담하던 지. 여행 갈 때 공항에서 여권 들고 줄 서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이제 마을버스의 지루한 마스크 안내 방송을 더는 안 들어도 되겠다.

승객 여러분 국토교통부의 코로나 일구 방역 강화 방침에 따라 마스크 미착용 승객 탑승 시 운전기사가 승차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차내에서는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하여 주시고 불필요한 대화는 가급적 자제하여 주시기 당부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동네 마을버스 안내방송

버스가 동네 ㅇㅇ교회 앞을 지날 때쯤이면 어김없이 '차내에서 마스크를 쓰라'는 녹음 방송이 흘러나왔다. 마스크 착실하게 쓰고 다니는 대부분 시민한테는 '불필요한' 내용이고, 외계인 손님이라면 한참 들어야 무슨 말인지 안다. 서론이 하도 길어서 다음 버스 정거장인 ㅇㅇㅇ성당 앞을 지날 때쯤이나 본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방송에선 차 안에서 마스크를 써야 하는 법적 근거를 먼저 설명하고 이어서 이걸 어기면 차에 안 태워주겠다는 '협박'을 늘어놓고 나서야 비로소 '마스크 쓰라'는 핵심 메시지가 나온다. 이론적 배경으로 시작해서 결론으로 끝나는 논문처럼, '왜 그러는지' 다음에 '안 하면 어떻게 되는지 ' 그리고 말미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로 맺는 구성이다.


마을버스 승객은 차 안에서 마스크 쓰는 규정이 국토교통부 방침인지 아니면 교황청의 포고인지 따위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런데도 방송은 누가 삿대질이라도 하며 따질 듯이 '왜 그러는지'를 설득하느라고 애쓰고 있다. 거두절미하고 마스크 쓰라고 하면 다 알아들을 텐데.


요즘 우리 사회의 공지사항 대부분이 이처럼 '~를 위해서', '~에 따라서' 같은 부가적인 정보로 변죽을 울리고 나서 요점으로 들어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인쇄용지를 분리해서 버리라는 아래 안내문은 전체의 2/3 이상을 취지와 규정을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인쇄용지 사용은 대량으로 이루어지며, 이에 따라 자원을 낭비할 가능성이 큽니다. 따라서, '지방자치단체 쓰레기처리 규정'에 따라, 사용한 인쇄용지는 반드시 재활용함으로써 자원을 보존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인쇄용지를 사용한 후에는 분리수거함에 재활용 용지로 분리하여 버리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위 사진에서 영문과 한글로 된 안내문을 보면 언어만 다른 게 아니라 어법도 판이하다. 아이와 반려동물의 출입을 금한다는 알파벳 6자의 영문판은 직관적이고 한눈에 내용이 들어오는 반면, 30자씩이나 되는 작은 글씨 한글판은 12살 이하라는 추가 정보가 있긴 해도 좀 들여다봐야 이해한다. 아니나 다를까 한글판은 이유를 먼저 설명하고 있다. 뭐가 켕기는지 '금한다'를 '제한' 이라는 어휘로 두리뭉실 돌려댔다. 한글판이 공손할지는 몰라도 신속 / 정확도에서 영문판에 떨어진다.


미국을 여행할 때 보면 현지 경찰관이 교통정리하면서 시민들에게 사용하는 말투가 고압적이다 (라고 나는 느낀다). 국립공원 셔틀버스 운전기사의 차 안에서 음식 먹지 말라는 당부도 되지 못하게 단호하다. 위 안내문 사진으로 말하자면 영문판 'NO KID / NO PET' 식 소통과 맞먹는다. 그렇지만 거기 사는 미국 사람들은 그런 간단 무식한 명령식 화법에 거부감 없이 잘 순응한다. 시민의 안전을 위해 위임받은 권한으로 공무를 수행하는 데 본연의 임무만 잘 해내면 된다는 실용적인 생각이다. 주민들이 돈 걷어 고용한 아파트 경비원은 드나드는 주민들에게 꼬박꼬박 인사하는 수고를 출입하는 과속 오토바이 단속하는 데 쏟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코로나 시국에 마스크 쓰고 다니는 건 공동체의 안전을 위한 행동 규범이다. 마스크 방송은 버스 기사의 개인적인 부탁이 아닌 당국의 조치인 바 친절보다는 신속/정확한 전달이 우선이다. 우물우물하다가는 미디어 홍수 속에서 알맹이가 살아남지 못하고 실종된다.


서두에 나온 마을버스 안내문을 신속 / 정확 위주로 편집해 보았다.

여러분 버스 안에서는 마스크를 꼭 쓰시오. 마스크를 안 쓰면 버스에 탈 수 없습니다. 차 안에서는 말하기를 삼가세요. 나라의 코로나 방역 방침입니다.

필자 편집

1)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맨 앞으로 끌어다 못을 박았고, 2) 안 하면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3) 왜 그러는지의 차례로 내용을 재배치했다.


말투는 직설적 명령조로 바꾸면서 권위가 생겼고 존대 어미는 대충 생략했다. 능력인지 가능성인지 헷갈리게 하는 '- 수 (있다)불완전 명사, 명령인지 간청인지 애매한 '-주시기 (당부드립니다)' 보조동사 따위 엉거주춤한 (=비겁한) 표현들은 날렸다.


편집한 원고를 읽고 '좀 불손하네', 또는' 좀 딱딱한데 '라는 독자가 있다면, 미국 경찰이 거만하다고 불평한 나처럼 주저리주저리 공지 문법에 익숙해졌기 때문일 터이다.


편집된 원고의 길이는 30퍼센트 이상 줄었고 반비례해서 핵심은 더 명확하게 드러났다. 군더더기를 빼 버린 메시지는 신속하게 전달된다.




여러 사람에게 알리는 통신은 빠르게 이해해서 쉽게 따를 수 있도록 작성하는 것이 먼저다. 반대로 배경과 이유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우리 사회의 풍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국 사람이 앞뒤 맥락을 이해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사람들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한국인의 특성을 묘사하는 대표적인 단어 중 하나가 ‘빨리빨리’다. 우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자상하고 신중했던가.


그보다는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집단적 '관계 불안 증후군' 탓이라는 견해가 나는 더 설득력 있다고 본다.


상호 간에 여차하면 당하게 될 공격에 대비해서 방어적인 어법을 구사하게 된다. 다짜고짜 마스크 쓰라고 했다가 괜히 욕먹을지 모른다는 피해의식에서 지레 국토교통부 어쩌고 늘어놓으며 방패 막이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존감을 상실한 어법은 우리 시대의 언어생활에서 여러 가지 꼴로 나타나고 있다.


'형님분' , '스님분' 따위 덕지덕지 존칭
이름 놔두고 직함을 존칭으로 끌어다 써서 상대방을 기쁘게 해 주는 호칭의 인플레
'돈 내라' 소리가 안 나와서 '결제 도와준다'라고 하는 말 돌리기
'죽였다' 대신에 '숨지게 했다'라는 말의 왜곡




성별, 지역, 교육, 재산, 직업, 주택, 명성, 정치적 지향 따위의 온갖 조건에 의해 우리 사회가 갈래갈래 찢어졌다.


집단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 주고받는 저주는 인간관계에 대한 무의식적인 불안을 심화시킨다.


불안한 가운데 어떻게 해서든지 사회의 여러 대상과 무난한 관계를 형성(해서 자기 존재를 인식) 하고 싶은 강박이 우리 언어를 이중 삼중 비루하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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