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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May 01. 2023

어르신 : 극존칭의 남용

늙은이-노인-어르신-?


'자네 어른은 안녕하신가' 할 때 '어른'은 남의 아버지를 높여 이르는 존칭이다. 예전엔 집안이나 마을에서 나이가 많은 원로도 '어른'이라고 불렀다. ( 예를 들면, 문중 어른 ) '어르신'은 이미 존칭인 '어른'을 한 번 더 높인 극존칭이다. 집안에서 연치年齒가 좀 있으신 소수의 할아버지가 '어르신' 소리를 들은 걸로 기억한다.


언제부턴가 '어르신'이 남녀 노인을 가리키는 사회적 지칭이 되었다. 행정기관에서 노인을 '어르신'이라고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집안의 어른을 사회의 어른으로 확장시킨 셈이다. 집안에서 돌보던 노인을 사회가 공동 부양하는 경향과도 맞아떨어진다.


그런데 노인 명칭을 '어르신'으로 일괄 대체하는 건 어색하다. '어르신'은 존칭이고, 존칭은 대화 상대방과의 상하 관계 설정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노인이 자기 자신을 노인이라 부를 수는 있어도 '어르신'이라고 높이지는 않는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통신하는 공적 언어에서 특정 사회적 범주의 유형 코드를 비중립적인 극존칭으로 강제하는 건 생뚱맞다. (학교 '선생님'은 예외로 하고) 그리고 젊은이의 입장에서는 역차별이다.





잘 쓰지 않던 호칭까지 발굴해서 사회적으로 배제당하는 노인들을 포용하려는 선의는 가상하다. 하지만 에멜무지로 노인을 '어르신'이라고 눙친다고 노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개선되지는 않는다.


'젊은이', '어린이'와 달리 '늙은이'는 욕이 되었다. '늙은이'의 대안인 노인이란 명칭마저 께름칙하다고 해서 다시 '어르신'으로 달아나는 건 대증요법식 처방이다. '어르신'의 약발이 떨어지면 또 무슨 말로 갈아 끼울 건가. 문제는 언어가 아니라 본질에 있다.


아줌마는 '부모와 같은 항렬의 여자를 부르는 아주머니의 준말 또는 어린아이의 말'이다. 어려서 고모를 아줌마라고 부른 기억이 난다. 꽤 오래전부터 모르는 여자들에게도 친근하게 쓰기 시작한 '아줌마'가 기혼 여성으로 인식되면서 혐오적인 멸칭蔑稱으로 변질되었다. 이제 국어사전에도 '아줌마'는 '아주머니'를 낮추어 부르는 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미 '어르신', '아버님', '어머님' 소리 듣기 싫다는 노인 당사자들이 많다. 머지않아 잘 못 불렀다간 봉변당할지도 모른다, '아줌마'처럼.  애꿎은 '어르신'도 강등되어 기피 언어가 될지 모르겠다. 말도 약藥처럼 오·남용하면 독이 된다.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230304/118170312/2?ref=main


표지사진 © alexas_fotos,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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