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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Mar 19. 2023

결제 도와주는 대신 깎아주든지

언어의 왜곡

© blakewisz, 출처 Unsplash


직원이 '결제를 도와드리겠다'고 말하자, '네가 뭘 도와줬느냐'며 소리를 지르고 계산대에 있는 빵을 손으로 쳐 피해자가 맞게 하는 등 17분간 소란을 피운 혐의도 있다. 
언론 기사


위 사건 기사에서 소리 지르고 폭력을 쓴 건 잘못이지만 '뭘 도와줬냐' 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요즘 식당이나 상점에서 돈을 낼 때 점원으로부터 흔히 듣는 '결제 도와드리겠다' 라는 괴상한 제안이 고상한 표현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계산을 도와주겠다고 나서기도 한다.


첨단 카드 기계 앞에 놓고 부가세까지 정확히 계산 끝내놓고는 개뿔 무얼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건지... 손님이 돈 내는 고통을 진정 위로하고 싶으면 말 돌리지 말고 값이나 깎아줘라.


'도와준다' 라는 생뚱맞은 표현의 유행은 누가 영어식 어법을 한 번 시늉내서 써 본 걸 너도나도 따라 하게 되지 않았나 의심한다. 영어에서 헤프게 써대는 'HELP'도 이제는 우리처럼 전혀 도와줄 맘이 없는 경우에다가도 쓰고 있다. 집 앞에 서성거리는 수상쩍은 흑인 청년에게 묻는 'CAN I HELP YOU' 는 '당신 뭐야' 에 해당한다.


'결제決濟'는 원래 '어음을 결제하다', '위안화로 결제하다' 와 같이 경제 주체가 금융 자산 거래에서 채권 채무를 종결시키는 청산 과정을 일컫는 전문 용어다. 


카페에서 커피를 시키고 돈을 주는 행위를 결제라고 해서 안될 것은 없으나 우도할계 격으로 낭비적인 언어다.


한편 '결제'는 승인한다는 뜻의 '결재決裁'와 소리 나는 게 비슷해서 서로 철자를 자주 혼동하는 단어의 쌍이다. 특히 한자를 배우지 않는 세대는 고쳐주어도 끝없이 실수가 반복되고 아예 (사진처럼) 대놓고 틀리기도 한다.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안 쓰면 된다. 어차피 과장되고 부정확한 '결제'대신 바르고 쉬운 '돈을 주다'로 바꿔 말하자.


점원이 손님한테 '만 이천 원 주세요'라고 하기가 거북해서 말을 돌리다가 복잡해졌다. 와중에 정작 '만 이천 원'이라는 요점은 '결제' , '도움' 이라는 포장 속에 갇혀 버렸다.


과대 포장이 환경을 오염시키고 과장된 언어는 듣는 이를 기만한다. 이런 경향을 주인 의식이 부족한 MZ 세대의 특징이라고 떠다미는 이들이 있던데 무책임한 주장이다. 새로울 것 없는 우리 사회의 오래된 고질병으로서 언어를 왜곡하는 정서와 한자어를 선호하는 사상의 소산이다.


'변소'가 '화장실'이 되고, '죽이다'를 '숨지게 하다'라고 비틀어 말하는, 순화를 빙자한 언어의 그릇된 가공이 계속되고 있다. '자살'이라는 단어를 자제하라는 신문윤리위원회의 지침도 실속 없는 말의 왜곡을 부추긴다. 자살을 모두 '극단적인 선택'의 결과로 몰 수는 없지 않은가?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언어 분식粉飾은 얼마 안 가 약발이 떨어지고 또 다른 대안을 찾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삼국시대 이래 우리말에 수천 년간 깊숙이 뿌리내린 한자어가 관념어와 학술어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우리말 어휘의 주류가 되었다. 전통시대에 양반 지식층이 한문을 독점하면서 한문=유식有識의 인식이 여전히 남아있어 '돈 내다' 같은 순우리말은 저급한 표현으로 몰려 사회에서 활용이 제한되고 있다.


물건이 '다 팔렸다' 대신 '매진', 벌금을 '매기다' 대신 '부과'라고 써야 번듯하고 안심이 된다. 배나 비행기에 싣거나 장치하는 걸 '탑재'라고 하는데, 컴퓨터에 들어가는 CPU나 소프트웨어도 '탑재'한다는 거창한 표현을 고집하고 있다. '공짜로 준다'는 말이 쌍스럽고 '저렴'해서 그런지 발음도 뜻도 어색한 '증정'이라고 쓴 지 오래되었다.



말이 어색하면 불편하다.



불편하면 말하기 싫어진다.



하기 싫은 말은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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