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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Mar 25. 2024

익숙한 것들과의 낯선 만남 :
미시감 未視感

어느 날 하늘 '天 천’ 자가 갑자기 이상하게 보였다. 들여다볼수록 모르는 글자마냥 낯설게 보인다.  '天 천'자는 예전에 어린이들의 한자 교재로 쓰인 천자문千字文에서도 맨 앞에 나오는 첫 글자로 4 획짜리 쉬운 한자다. ( 천자문에 어려운 한자도 더러 있기는 하다.)


가끔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믿어온 것들이 생소해질 때가 있다. 마치 처음 보는 듯 전혀 새로운 경험으로 다가온다. '미시감未視感’이라고 한다. 경험한 일이 없는 상황이 전에 어디에선가 겪은 것처럼 느껴지는 기시감(데자뷔)과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익숙한 것이 낯설게 느껴지는 현상을 말한다.


미시감은 사물, 공간, 사람 등 일상의 다양한 대상에서 경험하는 지각의 일시적인 오류다. 


매일 손에 들고 사는 스마트폰에서 마치 처음 만져보는 물건처럼 이질감을 느낀다든지, 동네에서 매일같이 지나다니는 오래된 가게가 새롭고, 저 마치 돌아가는 길모퉁이가 뜨악하다. 심지어 가족처럼 친숙한 사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순간적으로 '이 인간을 정말 내가 아나?'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가까이서 골돌하게 볼수록 더하다. 


익숙한 것들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순간적인 미시감은 반복적인 일상의 환경에서, 우리가 받아들이는 정보와 경험이 서로 어긋나는 인지적 불일치가 유발한다. 하지만 우리는 미시감의 순간들을 통해, 세상의 다채로운 면모를 발견하고 그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이해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여러 가지 일에 집중하다 보면 일시적으로 주의가 분산된다. 평소에 익숙한 대상을 바라볼 때 특정한 부분에 대해서만 인식하고 나머지는 간과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시각에서 동일한 대상을 관찰하면 이전에 주목하지 않았던 부분이 갑자기 시선을 끌어 미묘한 차이를 느끼게 한다. 같은 길을 가더라도 걸어갈 때와 차를 타고 갈 때의 분위기가 다르고, 가는 길과 돌아오는 길의 풍경 또한 차이가 있다는 걸 실감한다. 방향과 이동 속도에 따라 주변 환경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미시감을 체험할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인식을 확장시키는 기회를 얻는다. 




인간은 종종 어쩌면 자주, 일상적인 사물들에 대해 선험적으로 접근한다. 그것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왜 그 모양을 하고 있는지, 어떤 역사를 갖고 있는지를 고민하는 대신에 우리는 그저 그것들은 그것들일 뿐이라고 단정해 버린다. 평면적 단면만 보고 옆면이나 뒷면을 살피지도 않은 채 보이는 것이 전부인 양 믿곤 한다.


미시감의 순간은 사물이나 환경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변덕스러운지를 일깨워주는 귀중한 경험이기도 하다. 


미시감의 순간은 우리에게 묻는다. ‘정말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일까?’ ,  '우리가 매일 보고, 사용하고, 의지하는 사물들의 복잡한 다多면을 우리가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모든 것들을 혹시 실제로는 기시감처럼 가짜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시감은, 인간이 주어진 상황이나 관점에 따라 다른 경험을 하며 이를 통해 그 인식이나 판단이 달라질 수 있음을 알려준다. 우리가 함부로 무엇인가를 안다고 자만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과 함께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항상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겸손이 아닌 지혜의 표현이다.


기시감이든 미시감이든 순간적인 기억의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미묘한 경계가 우리가 삶을 더욱 깊이 생각하고, 더욱 소중히 여길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치매는 뇌의 기능이 손상되면서 기존에 알고 있던 것들이 갑자기 낯설어지는 질병이다. 사물이나 상황을 새롭게 인식한다는 점에서 미시감과 치매 환자의 증상 사이에는 흥미로운 유사성이 있다. 


만일 치매가 질병이 아닌, 되레 정상인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사물을 관찰하는 능력이라는 가설을 설정한다면,


치매 환자들이 어떤 계기에 미시감을 극복하고 그들만의 경륜으로 독특한 시각을 개발해서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통찰력을 득하는 한편,


기존의 인식이 희석되어서 자신의 정체성을 인지하지 못할 뿐이라는 모형을 검증할 수 있다면, 


치매는 해결해야 할 의학적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주장하면 내가 치매 환자로 몰릴 것 같아 여기까지만 합니다, 오늘은.


표지 사진 출처 Unsplash © simonesec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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