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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Aug 16. 2024

연패와 연패

헷갈리는 언론 기사

'형님' 오상욱, 구본길이 중심을 잡고 박상원, 도경동이 힘을 보태면서 남자 사브르 단체전 3[연패]를 일궈냈다.
언론 보도


이번 올림픽을 끝으로 은퇴를 밝힌 웡파타나낏은 결승에서 궈칭(중국)을 2-1로 꺾고 우승, 태국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종목 2[연패]를 달성했다. 
언론 보도


쿠바의 미하인 로페스(41)가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개인 단일 종목 5[연패]의 금자탑을 쌓았다. 로페스는 6일(현지시간) 샹드마르스 경기장에서 열린 2024 파리 올림픽 레슬링 남자 그레코로만형 130㎏ 급 결승에서 칠레의 야스마니 아코스타(36)를 6-0으로 누르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언론 보도


이날 패배로 한국 탁구는 올림픽 전 종목에 걸쳐 중국에 14[연패]를 기록했다.
언론 보도


이전까지 올림픽 역대 단일 종목 최다 [연패] 기록은 4[연패]였다. 로페스를 비롯해 육상 멀리뛰기 칼 루이스(미국), 수영 남자 개인혼영 200m ...
언론 보도


21[연패] CWS 외야수 개빈 시츠, 부친은 ‘21[연패] 볼티모어’ 선수 
언론 보도



이번 파리 올림픽 기간 중 시합 결과를 전하는 기사에 '연패'라는 말이 심심찮게 등장했다. 하지만 경기 내용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거나 앞뒤 문맥을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연패'가 연속 우승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내리 졌다는 건지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채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한자어 '연패'는 이어진다는 '연連' 뒤에 오는 ''에 따라 뜻이 정반대로 달라진다. 으뜸 '패覇'를 쓰면 '계속해서 우승한다'라는 '연패連覇'가 되고, 패할 '패敗'를 붙인 '연패連敗'는 '계속해서 진다'라는 말이다. 


위에서 예를 든 한국 펜싱 팀이나 태국 태권도 선수, 또는 쿠바 그레코로만 선수의 기사처럼  '3 연패를 일궈냈다.' , '2 연패를 달성했다.' , '5연패의 금자탑을 쌓았다' 등 성과를 강조하는 서술이 뒤에 오면 긍정적인 방향의 '연패連覇'를 짐작할 수는 있다. 


한편, '한국 탁구는 올림픽 전 종목에 걸쳐 중국에 14연패를 기록했다.'라는 기사만으로는 한국 탁구의 대 중국전 결과를 얼른 가늠하기 어렵다. '기록'은 중립적 표현이다. 다만 이걸 읽고 우리 탁구팀이 중국을 14번 연달아 꺾었다고 믿는 한국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까 다행이다. 


올림픽이 아닌 미국 메이저 리그의 '연패' 소식은 더  아리송하다. 나 같이 미국 야구 시세에 어두운 사람은  ' 21연패 CWS 외야수 개빈 시츠 '라는 제목만 갖고는 기껏해야 시카고 화이트 삭스 팀의 선수 얘기라는 것까지가 한계다. 개빈 시츠가 수십번을 이겼다는 건지 졌다는 건지 분간이 안 간다. 기사 본문을 한참 들여다 봐야지 시츠 선수 아버지가  오래전에 뛰었던 볼티모어 팀이 21번 연속해서 패배한 (연패連敗) 기록을 세웠었는데, 그 아들이 소속된 화이트 삭스 팀이 이번에 다시 21번 계속 지는 바람에 부자간에 나란히 흑역사 작성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읽는 사람은)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다. 



네이버 검색 화면 캡처


일본에서도 스포츠 기사에 우리처럼 '연패連敗', '연패連覇' 양쪽을 다 사용하지만 한자로 표기하고 있고 더욱이 '패敗''패覇'의 발음이 달라서 문제가 없다. 


한자어 단어 옆에 한자를 표기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이긴 하지만, 굳이 평소에 잘 사용하지도 않는 한자(패覇)를 섞어 써가며 독자들을 헷갈리게 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문학 작품은 읽는 이에게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주고 감성을 자극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뉴스는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우선이다. 독자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다의성 어휘는 독자들이 기사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고,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결국 언론의 신뢰도를 떨어뜨린다.


'연패'처럼 발음이 같거나 비슷하지만 뜻이 대립되는 한자어 쌍에 '피의자/피해자', '지양/지향' 따위가 있다. 범죄가 발생하면 혐의가 있는 '피의자被疑者'와, 신체나 재산 침해를 받은 '피해자被害者'가 생긴다. 하지 않는 게 '지양止揚'이고, 그쪽으로 향하는 게 '지향指向'이다. 


뜻이 상반되지는 않지만 발음이 엇비슷해서 자주 혼동하는 단어 쌍에 '결제'와 '결재'도 있다.  '결제決濟'는 금융계에서 쓰던 용어인데 어쩌다 일상에서 물건사고 돈 낸다는 뜻으로 통용하고 있다. 돈을 주고받는다는 표현이 민망해서 거창한 표현을 차용한 것 같다. '결재決裁'는 부하가 제출한 안건을 상관이 승인하는 행위다. 그런데 물건 팔고 돈 받으면서 '결재'라고 잘 못 쓰는 경우가 흔하고, 반대로 상급자에게 서류 올리고 '결제'해 달라고 하기도 한다.




한글 전용 정책을 융통성 있게 운영해서 주요 한자어 단어에 한자를 병기하면 좋겠지만, 한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가 많기 때문에 가독성을 떨어뜨린다는 점에서 논란이 있다. 


해결책은 간단하다. 그런 말 안 쓰면 된다.


'연패', '결제' 따위가 특정한 개념을 유일하게 가리키는 낱말이 결코 아니다. 혼동을 일으키는 다의어는 시대의 변화에 맞춰 명확하고 간결한 표현으로 대체할 수 있다. 


 '연패連覇'는 '잇달아 우승했다'라고 하면 뜻이 명확해진다. 꼭 한자어로 써야만 기사가 격식 있어 보인다(고 생각하) 면 '연승連勝'이 있고 '연우승'이라는 말을 만들어 써도 된다. 


언론은 고루한 표현을 고집하거나 외국어를 무분별하게 차용하기보다는 우리말의 창의성을 살려 새로운 표현을 개발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우리말은 더욱 풍부해지고, 독자는 정확한 정보를 효과적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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