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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Nov 15. 2024

질문의 방향, 마음의 방향

우리의 인사말 이야기

길을 가다가 우연히 아는 이와 마주치면 흔히들 '어디 가냐?'고 한다. 낯선이에겐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궁색한 인사말을 대신하거나 그저 대화를 트기 위한 매개체 역할도 하지만 이 질문들은 우리 공동체가 오랜 세월 만들어온 특별한 문화적 코드다. 이 사소한 물음 속에 우리 사회의 관계 맺기 방식과 소통의 지혜가 담겨있다.


'어디 가냐?'는 물음엔 '어디'에 방점이 찍힌, 행선지가 궁금한 설명형 의문문도 있고, 어디로 가든 간에 '가는' 행위 자체를 확인하는 판정형 의문문도 있다. 어느 경우나 질문의 핵심은 상대방 미래에 대한 관심이다. 이웃이 어디로 향하는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궁금해함은 (오지랖이 아닌) 상대방의 삶에 대해 관심을 표현하는 방식이고 더 나아가 그들의 삶에 '동행'하고 싶은 욕구를 보여준다. 마치 오랜 친구에게 '오늘 뭐 해?' 할 때 '함께 할 수 있을까?' 하는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는 것처럼.  


반면에, 지방을 여행하면서 자주 듣는 질문이 '어디서 왔냐?'다. 촌로가 낯선 이에게 묻는데, 기차역이라고 답하면 대화가 썰렁해져 삼천포로 빠진다. '어디서 왔냐?'에는 나그네의 직전 출발지가 아닌 그가 살고 있는 곳, 뿌리와 배경을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전통시대에는 본관과 고향이 이를 대신했다. 이는 모르는 상대의 출신과 배경, 그리고 삶의 경험을 이해하고 싶은 우리의 본능적인 욕구를 반영하는 질문 방식이다. 


아는 이에게는 행선지를 묻고, 모르는 이에게 출신을 묻는 사소한 이 두 가지 질문 방식은 우리가 얼마나 관계 지향적인 존재인지를 잘 보여준다. 아는 이의 미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들과 함께하고 싶은 우리의 바람을, 모르는 이의 과거를 묻는 것은 그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 싶은 우리의 기대를 드러낸다. 초면에 학교, 직장, 응원하는 스포츠팀, 군대 생활까지 서로 탐색하는 요즘의 세태도 '그럼 누구 알겠구나' , '나도 그곳에 가본 적이 있어'로 시작해서 서로의 공통점을 발굴해 가려는 과정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이미 변화를 겪고 있다. 공동체 중심에서 개인의 독립성을 중시하는 개인주의로 빠르게 전환하고 있다. 사적인 시간과 공간(프라이버시)의 존중을 강조하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사소한 질문도 조심스러워졌다.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자발적으로 개인 일상을 공개하는 빈도가 높아졌지만, 역설적으로 개인 정보 노출에 대한 경계심도 커졌다. 


이제는 친숙한 사이에서도 '어디 가냐'가 관계 형성이 아니라 개인 정보를 얻기 위한 의도로 오해받을 수 있는 세상이다. 자칫하면 '그게 네게 왜 중요한데'라는 무안한 반격을 당할 수도 있다. '어디서 왔냐'는 더욱 그렇다. 처음 보는 이에게 궁금한 사항 (나이, 학력, 사는 동네+아파트 평수, 직업+직급 ...) 이 많아질수록 출신을 묻는 게 위험해졌다. 다만 경비원이 만만하게 보이는 침입자에게 퉁명스럽게 묻는 '어디서 왔냐'는 '당신 뭐야' ( 영어로 can I help you)에 해당하는 '심문'이므로 여기서 논외다. 




우리의 일상적 표현 방식은 시대를 반영한다. '어디 가냐'와 '어디서 왔냐'라는 질문은 오랫동안 우리 공동체의 따뜻한 관심과 배려를 담아왔다. 그러나 이제 이 질문들은 새로운 해석과 맥락 속에서 조심스러워졌다.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하면서도 공동체의 유대를 지키는 언어, 이것이 현대 한국인의 새로운 과제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오래된 언어 습관을 완전히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는 지혜일 것이다. '어디 가냐'는 여전히 따뜻한 관심의 표현이 될 수 있고, '어디서 왔냐'는 여전히 서로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다만 그 질문을 던지는 방식과 맥락에 대한 세심한 고려가 필요한 시대다.


이제 우리는 개인의 독립성을 존중하면서도 공동체의 정은 잃지 않는, 그 미묘한 균형점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언어는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가고 있다. 친밀함과 예의, 관심과 배려가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소통 방식을 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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