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문화, 갑질문화...
우리 사회의 바람직하지 못한 관습을 '문화'라는 허울로 포장하는 풍조가 있다. '음주 문화'하면 거창하고 있어 보인다. 데이터 입력 실수를 '전산 오류'라고 둘러대거나, 정상회담에서 언쟁을 벌이고 나서 '솔직한 의견 교환이 있었다'라고 발표하는 외교적 수사修辭와 같은 '꽈'다.
'문화 文化'를 '한 사회가 공유하는 주요한 행동양식'으로 정의한다면, '군대 문화'처럼 집단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슬쩍 '문화'를 갖다 붙인 게 언어적 야바위까지는 아니다. 하지만 중립적 서술을 넘어 집단의 문제를 미화하는 수단으로 '문화 돌림'하는 심리적 기제는 경계해야 한다.
이런 현상은 (일본 사람들이 난학을 통해 서구의 사상을 한자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중국 서한西漢 시대부터 통용되었다고 하는 '文治敎化 문치교화'라는 규범을 얼마나 참고했는지는 모르겠지만서도) 'Culture'와 Culture를 번역한 '문화文化'가 각각 담고 있는 의미의 범위에서, 강조하고 있는 개념의 무게 중심이 서로 다르고 때로 겹치지 않는 대역도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예를 들어, 밥을 영어로 번역한 Rice와 비교해 보면, '밥'은 쌀밥뿐만 아니라 식사를 통칭하지만, (나는 아직도 모든 승합차를 봉고차라고 부른다.) 벼는 별도다. 반면, 'Rice'는 쌀밥과 벼를 아우르지만, 식사까지 뜻하지는 않는다.
'Culture'는 '가꾸고 경작한다'는 뜻의 라틴어 '쿨투라 Cultura'에서 비롯한 어휘로서, 주어진 자연을 가꾸어 만든 산물이나 행위를 기술적技術的으로 설명한 개념이다. 'Culture'는 인간의 창조적 활동과 그 산물을 포함하되 그러한 성취를 '문화 文化'만큼 두드러지게 강조하지는 않는다. 반면, '문화 文化'는 집단의 단순한 행위 양식을 넘어 예술적, 학문적 업적까지 포괄하며, 고상한 '글월 문文' 덕분에 긍정적이고 자부심을 자극하는 느낌이 강하다. '문화유산' 같은 표현에서 보듯 문화는 보존하고 자랑스러워해야 할 전통이나 민족적 정체성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다 보니, 손을 봐야 할 일시적 관행조차 '갑질문화'네 '회식문화' 네 해가며 우리의 고유한 가치인 양 꾸며댄다. 비판하기 껄끄러운 '문화'라는 명색 뒤에 숨어서 '이게 우리 문화니까...'식으로 변명하며 개인과 사회의 책임에 물을 탄다.
말은 똑바로 해야 한다. 사용하는 말이 우리의 인식과 행동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문제'가 '문화'로 박제되는 순간, 그 행위는 불가피한 것처럼 보이기 시작하고 '해결'보다는 '보존'의 대상으로 기운다.
부적절한 '-문화' 꼬리표 달기를 거부하고 '관행', '습성', '성향', '특성' 등으로 구체화하거나 또는 있는 그대로의 '문제'로서 직시하는 용기가 바로 진정한 문화적 성찰이다.
본질을 흐리며 애매하게 갖다 붙이는 만능어는 '문화' 말고도 요즘 꽤 있다.
환경 : 물리적 또는 사회적 조건을 뜻하지만 지나치게 사용해서 단어의 무게를 잃고 그저 분위기나 상황으로 얼버무리는 용도로 애용한다.
'기업 환경의 변화가 필요하다.' --> 기업 구조조정이나 리더십 문제, 구체적 정책 부재 같은 핵심은 우회하고 '환경'이라는 꼬리를 붙여 상황을 추상적인 사안으로 만든다. 책임 주체가 모호하고, 개선 방향도 불투명해진다.
혁신 : 원래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변화를 이루는 것을 의미하지만, 흔히 현실에서는 구체적 대책 없이 변화에 대한 막연한 의지를 부풀리는데 쓰인다. 조금 더 나가면 '뼈를 깎는', '분골쇄신' 따위 살벌한 '의학 용어'가 따라붙는다.
'교육 혁신을 이루겠다.' --> 실제로는 기존 정책을 약간 수정하거나, 당장의 구체적 실행 계획 없이 말뿐인 선언으로 끝나기 십상이다.
관리 : 일상적 행위를 뭔가 특별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정보 관리', '고객 관리' --> 데이터 분석, 고객 지원 등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활동을 명시하지 않고 얼렁뚱땅 넘어간다. 관리라는 단어만으로는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했는지 알기 어렵다.
'피부 관리', '몸매 관리' --> 예사로운 자기 몸뚱아리 돌보기를 지나치게 전문적인 행위처럼 과장하는 효과가 있다. 상업적 맥락에서 이러한 표현이 소비를 부추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