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기행
여기 사람들이 '공공청사'라고 부르는 '거제시 공공청사'는 거제도의 행정 중심지인 고현동 시내에 있었다. 여러 기관이 입주해 있는데 시민들에게도 행사나 교육 용도로 공간을 대관하고 있다. 1층 주차장에 빈자리가 없는 걸 보고 근처 도서관에 차를 놔두고 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꼭대기 6층에 올라가 강당 문을 열고 들어가니 강의 시작하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도 머리가 희끗한 스무 남은 수강생들이 벌써 와서 웅성웅성 얘기를 나누고 있다. 거제 향교 사무국장이 전화 한 사람이냐며 맞아준다.
거제도 여행 기간에 마침 '시민 및 유림 대상 교양 강의'가 있다고 해서 '청강생'으로 참가했다. 향교가 주관하고 시에서 후원한다.
지역에서 공연하는 콘서트, 연극, 영화 등을 체험하는 것도 여행하는 재미 중 하나다. 여행가서까지 그런 걸 굳이 하냐는 사람도 있지만, 여행은 단순히 새로운 장소를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고 일상의 틀을 벗어난 여행 중에 오히려 그런 여유를 얻기 쉽다.
거제 향교에서는 정기적으로 시민을 대상으로 교양 강좌를 주관하는데 이번 시간에는 논어 향당 편이다.
내가 수년 전 논어를 공부할 때 향당편鄕黨篇을 띄엄띄엄 넘어간 이유는 논어 20 편 중 열 번째로 반환점에 있어 꾀가 나기도 했고, 공자의 식습관 같은 일상생활을 소재로 하고 있어 좀 지루했던 듯하다.
향당 8장에 나오는 유주무량 불급란唯酒無量不及亂(아무리 술을 마셔도 어지러운 지경에 이르지 않음)만 생각난다. 해석에 따라 공자를 술고래로 오해할 대목이지만, 주량은 각자 다르더라도 적당히 실수 없이 마시라는 가르침이리라.
김강호 박사가 강독한 이번 향당 편 강좌에서 내가 건진 문구는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는다'라는 '석부정席不正 부좌不坐'이다. 자기가 앉을 자리가 아니면 아무리 높은 지위도 나가지 않았고 그 자리가 비록 낮은 자리라도 사양하지 않았다는 현재 진행형 교훈이다. 고전의 유효기간은 수천 년이라는 사실을 거제에서 새삼 깨닫는다.
내친김에 그날 오후에 향교를 찾았다. 거제 향교는 조선시대 거제의 중심지였던 거제면에 있었다.
향교는 고려와 조선시대 지방 교육을 담당하던 관학 교육 기관이다. 현재 중·고교 과정에 해당하는 교육 시설로서 당시 양반 자제 (나중엔 평민 자제도 포함) 들을 대상으로 사서삼경을 비롯해 학령, 사목, 절목 등을 가르쳤다.
표지석을 지나 좁은 골목길을 들어가면서 하마비下馬碑 앞에서 차를 내렸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데 향교 외삼문과 주차장이 나온다.
대개 향교는 보수하거나 행사가 있는 날이 아니면 문이 잠겨있는데 거제 향교는 개방되어 있었다. 얼마 전 바람이 세게 불어 동문 처마 일부가 허물어져 노란 띠를 둘러놓았다. 나오는 문인 서문西門으로 들어갔다. 향교는 동문으로 들어가서 서문으로 나온다.
향교 같이 신전이 있는 유교 시설물은 일반적으로 동입서출東入西出의 요령으로 드나들게 되어있다. 여기서 동, 서는 자연 방위가 아니고 안쪽에 자리한 주체의 관점, 즉 향교의 경우 대성전에서 바라보는 기준으로 왼쪽을 동편으로 간주한다. 출입자 기준으로는 우측통행이지만, 주체의 기준으로는 좌측으로 들어오고 우측으로 나가는 개념이다.
공부하는 공간인 명륜당이 제사 지내는 대성전 앞에 서있는 일반적인 전학후묘 구조로 되어있는데, 명륜당 안에 책걸상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대개 명륜당의 대청마루는 휑하니 비어있는데 거제 향교의 명륜당은 명실공히 교육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뒤에 들은 바로는, 6.25 때 거제도 수용소에서 풀려난 포로들과 피난민들이 거제도 전역에 흩어져 살며 향교에서도 기거했는데 그때 명륜당에 유리문을 해달았다고 한다.
돌아 나오다 향교 동재(전통시대에 향교 학생의 기숙사로 쓰임)의 문이 열려있어 들여다보니, 송수영 사무국장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향교와 엑셀 프로그램의 대조가 재미있다. 마침 틀어 놓은 추구 낭송 소리 때문에 일부러 기척을 내니 그제야 사무국장이 돌아본다.
추구推句는 예전에 초학初學들이 천자문, 사자소학과 함께 (아마 서당에서) 가장 먼저 익히는 책이었다고 한다. 좋은 시구詩句를 익힘으로써 아이들의 정서함양과 사고력 발달 및 문장력 향상에 그 목적이 있었다고 자료에 나와있다. 다섯 자씩의 시구로서 天高日月明 (하늘이 높으니 해와 달이 밝고)로 시작한다.
거제 향교에서는 시민 교양 강좌 외에도 아동들을 대상으로 전통예절과 선비정신을 교육하고 있는데 의외로 잘 따라온다고 한다. 예를 들면, 예기에 나오는 '출필곡 반필면 出必告 反必面 [나갈 때는 반드시 (부모에게) 나간다고 말하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얼굴을 보여라] '을 가르칠 때 왜 집에 돌아와서 얼굴을 보이며 인사드려야 하는지의 까닭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이들이 잘 이해하더라고 사무국장이 강조한다.
우리나라 전역에 이백여 곳의 향교가 있다. 향교는 문화유산이자 전통시대의 교육 기관이다. 박제해서 외형을 유지하는 데만 노력과 비용을 집중할 게 아니라, 여기 거제 향교처럼 향교의 본질인 지역 사회 교육에 활용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