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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Oct 09. 2024

[거제] 걷기 좋은 섬 길

거제 기행

거제도에서 남파랑길 몇 구간을 걸었다.


남파랑길은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서 전남의 해남 땅끝마을까지 남해안을 따라 조성한 1,470km 걷기 여행길로서 90개 구간으로 나누어 놓았다. 굳이 '남쪽(南)의 쪽빛(藍) 바다와 함께 걷는 길'이라고 풀이해 주지 않아도, '남파랑길' 하면 '남쪽', '파도' 등을 연상한다. 길을 걸으면서 다도해의 수려한 경관과 화려한 도시, 농어촌마을의 소박함을 경험할 수 있다.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부산 오륙도 해맞이 공원을 잇는 해파랑길과 연결된다. 


남파랑길


남파랑길 24 일부 구간 : 저구항 - 쌍근마을, 역행
거리 : 8.7 킬로 미터
이동 시간 : 2h 24m 
총 획득고도 : 268 m
난이도 : 쉬움


내가 묵고 있는 쌍근 마을을 남파랑길이 지나간다. 마을에서 1.6 킬로미터 더 가면 남파랑길 24 구간의 종점인 탑포마을이다. 쌍근 마을에서 24 구간의 시점인 저구항을 향해 역진하기로 했다. 기온은 24도로 9월 하순치고 더운 날씨다. 


오른쪽으로 바다를 끼고 800 미터쯤 가서 캠핑장을 지나니 길이 산으로 들어간다. 왕조산(411미터) 중턱을 돌아 저구항으로 가는 콘크리트 임도다. 나는 다음 날 이 밋밋한 임도를 그리워하게 된다.  


바다 쪽을 끼고도는 해발 100 미터 정도의 호젓한 둘레길에서 숲 사이로 간간이 바다가 내려다 보인다.



출발지 기준 3.8 킬로미터 지점을 지날 무렵 벤치가 있는 전망대가 나오며 바다가 탁 트인다. 지도상에서 보면 오른쪽이 추봉도고 왼쪽이 죽도다. 두 섬 모두 통영시 소속. 전망대를 지나면서 바다가 자주 보인다.

리본과 화살표가 남파랑길을 안내한다. 우크라이나 깃발처럼 노랗고 짙푸른 리본이 길가에서 팔랑이며 내가 아직 길을 잃지 않았음을, 빨강 파랑 화살표 딱지는 방향 또한 맞게 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며 공간 지각 능력이 장애자 수준인 나를 안심시킨다. 빨간 화살은 순방향인 여수 쪽을, 파란 화살은 부산 쪽을 가리킨다. 나는 역방향인 부산 쪽으로 걷고 있다. 


  

종점 1 킬로미터 전 삼거리에서 우회전해서 저구항으로 내려간다. 남부면 소재지이기도 한 저구마을은 수국으로 유명한 조용한 어항이다. 방파제 근처, 매물도 가는 여객선 터미널 앞이 남파랑길 23길의 종점이자 24 길의 시점이다.


쌍근 마을로 돌아가려고 버스 정류장에서 대중교통 앱을 켜니 '도착 예정 정보 없음'. 물어볼래도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다. 요즘 농어촌의 특징이다. 마침 버스가 한 대 오길래 반겼지만 근처만 다니는 마을버스란다. 가게에 들어가서 물으니 내가 탈 '시내버스'는 한 시간 반쯤 기다려야 한다고. 온 길을 되짚어 걸어갈까 하다 지루했던 임도가 떠올라 포기한다. 


지방에서 둘레길을 걸을 때 원점으로 복귀할 이동 수단이 애매하다. 농어촌을 다니는 버스의 배차 간격이 짧아야 두 시간이고 24 시간 짜리도 있다. 하루에 한 번 다닌다는 얘기. 인구가 줄고 자차 이용이 늘어 수요가 받쳐주질 않으니 버스는 운행 횟수를 점차 줄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둘레길 시점과 종점을 잇는 직행 노선이 없는 경우가 흔하다. 군청 소재지 같은 데로 나가서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수년 전 친구와 둘이서 지리산 둘레길을 걸을 땐, 미리 목적지에 차 한 대를 가져다 놓고 다른 차에 둘이 함께 타고 출발점으로 와서 걷기도 했다. 이 말을 들은 민박집 주인의 한심하다는 표정을 아직 기억한다.


혹시나 하고 카카오 택시를 클릭했더니 15분 거리에서 출발한다는 멧시지가 뜬다. 유비쿼터스 시대다. 


저구항

 

남파랑길 25 구간은 원점 복귀의 편의를 위해 구간 종점인 거제 파출소까지 버스를 타고 나가서 시점始點인 탑포마을로 역행하는 전략을 수립했다. 그리고 24 구간 걸을 때 미답 부분인 탑포마을에서 쌍근 마을까지 마저 걷기로 했다. 

남파랑길 25구간 : 탑포마을 - 거제 파출소 + α  : 탑포마을 - 쌍근마을 
거리 16.1  km
이동 시간 :  4h 24m
총 획득고도: 405 m
난이도 : 보통


시골에서 버스 탈 때마다 요금 낼 잔돈을 준비하지만 이제까지 전국 어디서나 수도권 교통카드가 안 먹힌 적이 없다. 다만 내릴 때 카드를 대고 내리는지가 지역마다 다를 뿐이다. 문 앞 노약자 석에 앉았다가 다음 정류장부터 올라오는 승객들의 '연식'을 보고 슬그머니 뒷자리로 옮겨 앉았다. 


거제 면사무소에서 버스를 내려 거제현 관아를 둘러보고 남파랑길 25 길의 종점인 거제 파출소로 가서 탑포마을을 향해서 출발했다. 파출소 옆 골목을 빠져나가니 거제만灣이 펼쳐진다.

거제만 굴 양식장


바닷물에 잠겨있는 막대들이 뭐냐고 지나는 (내 짐작에)모녀에게 물으니 어머니가 굴 양식장이라고 급히 내뱉고는 딸의 손을 얼른 잡아끈다. 경계심을 유발하는 나의 행색도 민폐다. 굴 양식은 조선 초기 기록에도 나올 만큼 역사가 깊다. 거제-한산만은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도 인정한 패류 위생 적정 해역이다. 


거제만 둑을 800 미터 정도 걷다 오수마을 방향 아스팔트 길로 좌회전, 천변을 걷다 시멘트 포장한 논 둑길을 간다. 해풍 맞은 거제도의 벼가 익고 있다.


오망천변을 걷는데 어느 체험장 간판이 보인다. 이름이 못 마땅하다.


출발지 기준 4킬로 지점에서 개천길이 차도로 바뀐다. 하나로마트에 볼일 보러 들어간 김에 부라보콘 하나를 사들고 나와 길가 벤치에 앉았다. 군대 훈련소의 악몽 같은 기억을 떠올리며 시장에서 부라보콘을 집어드는 남자 노인네들이 아직 꽤 있다. 피엑스에서 파는 삼립 크림빵과 함께 해태 부라보콘 (논산 훈련소에서는 메도골드라고 부르더라.)은 사회와의 유일(이)한 연결고리이자 사치였다. 


다리를 건너 부춘리 방향으로 인도가 없는 차도를 걷는다. 섭씨 27도 날씨에 걷는 아스팔트 길은 '남파랑길'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번 구간은 (이제까지) 대부분 차도를 끼고 통과했다. 지난 24 구간에서 지루해했던 임도가 그리워진다. 


시골에선 다니는 사람이 적어서 그런지 인도 없는 차도가 많다. 인도가 있어도 잡초가 무성하다. 시골길에 인도를 구분해서 설치하는 게 비효율적이라면, '보행자 우선 도로'를 지정해서 보행자가 차를 피하지 않고 자유롭게 다니게 하면 어떨까라고 제안한다면, 내가 너무 이기적일까?

출발 6킬로미터 지점 마하재활병원 앞에서 큰길을 벗어나 마을 쪽으로 방향을 튼다. 같은 아스팔트 길이지만 좀 한산하겠지 하는데 뒤에서 덤프트럭이 탱크 소리를 내며 돌진해 온다. 


부춘 마을 어구 정자에 올라가 요기를 하고 한참 쉬었다. 


지자체에서 주민들 쉼터로 정자를 다수 설치해 놓았지만 이용자는 많지 않다. 대부분의 정자가 신을 벗고 올라가게 되어있어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규칙을 어기든지 아니면 올라가지 않고 걸터앉든지. 요즘은 식당도 좌식에서 입식으로 바꾸는 추세다. 신을 신은 채 올라가게 해 줘야 정자의 이용률이 올라가지 않을까 한다. 


부춘 마을을 지나 구간의 반 정도를 넘기니 노자老子산으로 들어가는 포장 임도가 시작된다. 임도가 반가울 수도 있구나! 늙지 않고 오래 사는 신선이 된다는 뜻에서 노자산이라고. 해인사 팔만 대장경판을 거제도 나무로 만들었는데 노자산, 가라산등에서 나무를 베어다 바다를 통해 강화도로 날랐다고 한다. 


조금 들어가니 왼쪽으로 방죽이 숨어있다 모습을 드러낸다. 고요함과 평화. 



1 킬로 정도 임도가 끝나고 12% 경사의 산 중 아스팔트 길을 만났다. 호젓한 차도라고 중얼거리는 순간 오토바이가 굉음을 내며 맹속으로 산 길을 튀어 올라간다. 뭐가 그리 급할까, 음식 배달은 아닌 거 같은데.


도로 정상에서 다시 임도로 꺾어 들어가다 약수터를 만나 물병에 물을 채웠다. 포장 비포장이 섞여있는 임도다. 인적 없는 산길이 무섭지 않냐고 누가 물어보던데, 나는 덤프트럭 질주하는 차도가 무섭다. 


출발점 10 킬로미터 지점에 솔곶이 마을 표시와 함께 비포장 숲 길이 이어지고 조금 더 가니 벤치가 있다. 잡초가 무성해서 뱀 나올까 봐 벤치 위에 책상다리하고 앉았다. 파노라마 케이블카 정상 정거장 뒤통수가 올려다 보인다. 



출발점 13킬로 지점 둘레길에서 500 미터 내려가 솔곶이 마을에 도착. 이제 구간의 막바지다. 여자 노인 둘이 앉아 담소하고 있는 길가 평상에 양해를 구하고 걸터앉았다. 어디서 왔냐고 물어서 거제 파출소에서부터 걸어오는 길이라고 했다가, 사는 곳은 경기도라고 부연했다. '어디서 왔냐'는 출발지가 아니라 전통적인 신분 확인의 일부다.


휘어진 해안 저편으로 구간의 시점인 탑포마을이 보인다. 지난번 남파랑 24 길 걸을 때 미답 부분인 탑포 마을-쌍근 마을 1.6 킬로미터를 내처 걷고 마무리했다. 


거제 천주교 순례길 일부 : 예구항-공곶이-돌고래 전망대-공곶이-예구항
거리 : 5.2 km
이동 시간 :  2h 15m
총 획득고도: 239 m 
난이도 : 보통

남파랑길 21구간을 공략해 보기로 한 이유는 앞서 걸은 남파랑길 24, 25 구간에서 경험하지 못한 해안길에 대한 환상 때문이었다. 


역시 더운 날이었다. 구간 시점인 거제어촌민속전시관 주차장에 차를 두고 부둣가 도로를 걷기 시작했다. 2 킬로미터 지점에서 지세포 성을 향해 언덕바지 골목길을 올라가며 예감이 이상했다. 돌로 쌓은 성곽의 마루를 뒤뚱거리며 한참 걸었는데 이정표는 안 보이고 되레 우리가 걸어온 쪽으로 길을 막으며 (돌 성곽길이) 위험하니 돌아가라는 경고판이 붙어있다. 동행한 집사람이 앞서 가다 성을 가로질러 넘어가라는 표시를 놓친 듯하다. (본인은 물론 부인함) 성곽 마루를 다시 걷지 않고 우회하는 경로를 모색했으나 실패하고 다시 해안도로로 내려갔다.  '함께 가면 멀리 간다.' 던데 '함께 가다 길을 잃었다.' 


(한 번 가보기로 했던) 지심도가 생각났다. 지세포 항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데 배 출발시간까지 10분도 안 남았다. 현 위치에서 유람선 부두까지 걸어가면 20 여분. 다음 배는 두 시간 후에나 있다. 임신부가 진통이라도 시작한 듯 세차게 손을 흔드니 지나가던 승합차가 급정지하며 창문을 내린다. 도움을 청하니, 차에 사람을 태울 '상황'이 안된다면서 미안해한다. 옆자리에라도 어떻게 안 되겠냐면서 들여다보니 컴퓨터 모니터가 실려있다. 결국 운전자가 곤혹해하며 내려서 뒤로 가더니 해치백을 연다. 차 뒤자리에 황급하게 올라타고 나서야 우리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2,3열 좌석을 없앤 바닥에 침구가 깔려있고 천정과 벽에 취사도구가 걸려있다. 내부를 개조한 캠핑카였다. 침실 겸 부엌 겸 식당 겸 서재로 쓰는 금단의 공간에 낯선 부부가 난입한 것이다. 졸지에 배 시간까지 책임진 착한 60대 운전자는 속도를 올리면서 우리 보고 꼭 잡으라고 당부한다. 엉겁결에 캠핑카 주인의 연락처를 못 챙겼다. 시나리오는 언제나 이렇다. 


살면서, 나 같으면 베풀 수 없을 만큼의 친절을 남에게 강요하고 그로써 얻은 이익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험을 한다. 영국의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자신의 저서 '축의 시대'에서 수많은 동서양의 종교와 도덕, 철학에서 '네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라는 황금률(Golden Rule)이 공통적으로 발견된다고 주장했다. 즉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신약 마태복음 7:12)와 '내가 하기 싫은 바를 남에게 하지 마라 己所不欲 勿施於人기소불욕 물시어인(공자, 논어)은 동일한 가르침이라는 거다.


결국 지심도 가는 배를 놓치고 지세포 근처에 있는 순교자 윤봉문 요셉 성지에 갔다가 남파랑길 21구간 대신 천주교 순례길로 노선을 변경했다. 21길의 종점인 구조라 해수욕장에서 4 킬로미터 떨어진 예구항(일운면 와현리)을 출발해서 돌고래 전망대까지 갔다가 원점으로 돌아오는 짧은 코스로서 남파랑 21길과도 일부 겹친다.  

예구항 , 사진출처: 예구미.com

윤경문 베드로 가족 등 초기 천주교 신자들이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움막을 짓고 살았던 공곶이와 가매느른 바위 (현, 돌고래전망대), 서이말 은둔지(현, 서이말등대)까지 아름다운 숲길과 바다를 바라보면서 걷는다. 


한적한 어촌마을 예구에서 20분가량 완만한 숲길을 걸어 오르다가 아래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바로 거제 8 경이라는 공곶이 가는 길이다. 공곶이 주민 고 강명식 씨 부부가 손수 쌓았다는 333 계단이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공곶이 내려가는 길


공곶이엔 노부부가 손수 가꾼 농원이 넓게 자리하고 있다. 동백나무와 종려나무, 수선화 등 각종 꽃과 나무들이 싱그러운 생명력을 뿜어내는 곳이다. 봄에 오면 동백꽃과 수선화가 만발해 있으리라. 농원에서 내려가면 바다 너머로 내도가 가까이 보인다. 해안에 동글동글한 몽돌이 널려있고 나무에도 열렸다. 


공곶이에서 1.5 킬로미터 정도 해안을 낀 숲길을 가다 전원교회로 직진하지 않고 밑으로 내려가면 가매느른 바위에 다다른다. 아래는 가마처럼 생겼고 위는 넓다 하여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돌고래의 이동과 생태를 관측할 수 있는 돌고래 전망대가 설치돼 있다.     



돌고래 전망대에서 공곶이로 되돌아와서 이번에는 (다행히도) 333 계단을 오르지 않고 해안길을 따라 예구항으로 복귀한다. 외딴 바닷가에 깨끗한 화장실이 있다. 화장실 인심이 후한 한국. 예구항으로 가는 길에 거쳐간 멸치 잡이하던 '후릿자리'는 며칠 후 체험할 정치망 멸치 어업의 예고편이 되었다. 


길을 잃고 찾아간 순례길에서 깊은 울림을 안고 돌아왔다.


예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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