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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짓날 다산이 건괘乾卦를 펼친 이유

by 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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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사의재기四宜齋記' 마지막 줄에 '사실상 갑자년(1804년)이 시작되는 동짓冬至날, 나는 주역�易의 건괘乾卦를 읽었다'라는 멋있는 대목이 나옵니다. '사의재기'는 정약용이 전라남도 강진 유배 시절에 느낀 자기 성찰과 생활 원칙을 기록한 글입니다. '사의재四宜齋'는 그가 머물던 주막집 방에 붙인 이름이고요. 양력으로 치면 1803년 12월 22일의 기록이 됩니다


사의재기 원문에는 동지를 '일남지日南至'로 표현했습니다. 태양의 고도가 가장 낮아 남쪽에 치우쳐 보이기 때문이겠지요. 동지는 북반구에서 연중 해가 가장 짧은 날입니다. 음陰이 극성한 동시에 양陽이 새로 돋는, 한 해의 과학적 시발점이기도 합니다. 어두운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고, 추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 동지는 만물이 다시 생명력을 회복하기 시작하는 시기입니다. 옛사람들은 이를 천문 현상보다는 우주의 기운이 전환되는 지점으로 인식했습니다. 가장 어두운 순간이 곧 희망의 시작이라는 순환의 원리가 바로 동지에 담겨 있습니다.


주역은 우주 만물의 변화 원리를 64개의 괘卦로 설명한 철학서입니다. 그중 건괘乾卦는 으뜸이 되는 괘로서 하늘의 도리이자 군자가 추구해야 할 덕을 상징합니다. 건괘의 괘사卦辭인 '원형이정元亨利貞'은 천지자연의 변화를 네 단계로 나눕니다. 원元은 만물이 시작되는 봄, 형亨은 성장하는 여름, 이利는 결실 맺는 가을, 정貞은 완성되고 다시 준비하는 겨울입니다.


건괘에는 일곱 개의 효가 있는데 각 효를 용龍의 변화로 비유합니다. 처음에는 물속에 잠긴 용(잠룡潛龍)으로 때를 기다리고, 점차 땅 위로 나와 스승을 만나며, 부지런히 힘쓰다가, 연못에서 뛸까 말까 고민의 순간을 거쳐, 마침내 하늘을 나는 비룡飛龍이 됩니다. 그러나 너무 높이 올라가면 오만해져 후회하게 되고(항룡亢龍), 결국 여러 용(군룡群龍)이 조화를 이루며, '진정한 고수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완성의 경지에 도달합니다. 이 단계들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성장과 성숙의 여정과도 닮았습니다.


유배 2년 차 겨울, 정약용은 강진의 주막집에 딸린 방에서 혹독한 추위와 고독 속에 있었을 터입니다. 그해 동짓날 선생이 건괘를 펼쳐 든 건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동지와 건괘는 모두 '시작'의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극에 달하면 반드시 돌아온다는 물극필반物極必反의 이치는 개인의 운명을 넘어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법칙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자기를 수양하며 새로운 희망을 찾으려는 다산의 굳건한 각오를 짐작케 합니다.


새해부터 실천하려는 결심이 있다면, 1월 1일까지 기다리지 말고 오늘 동지부터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요? 우주의 기운이 새롭게 태동하는 이 시점에 함께 움직인다면 자연의 흐름과 함께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팥죽 한 그릇의 따스함과 함께, 마음속 작은 희망의 씨앗을 심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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