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의 공과功過는 곱셈이 아닌 덧셈으로 계산해야
전에는 칠십이 넘은 재벌 총수를 팔팔한 수행 비서가 못 따라간다고 엄살 부리는 신문 기사가 가끔 눈에 띄었다. 재벌 창업주들이 아직 활동하던 시절이다. 회장들의 체력이 특별히 왕성한 것도, 비서들이 약골인 것도 아니다. 늙은 총수의 노익장을 과장 홍보하려는 꾸밈도 있었겠지만, 한쪽은 자기 맘먹은 대로 움직이고 다른 한쪽은 따라간다는데 그 비밀이 있다. 오직 사업 생각에만 몰두하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노인네를 따라다니다 보면 젊은이라도 숨이 차게 돼있다. 재벌 1세대는 그런 강인한 의지와 기업가 정신으로 무에서 시작하여 업을 이룬 사람들이다. 우리나라의 재벌은 가족 중심의 기형적 지배 구조를 가진 기업 집단이다. 번역할 마땅한 영어 단어가 없어 영국 옥스퍼드 사전에 우리말 발음 'chaebol' 이 그대로 등재될 정도로 한국에서 발달한 독특한 기업 집단의 형태다. 이제 우리나라 10대 재벌들은 세대교체가 되어 생존해 있는 창업주는 없다.
우리나라의 경제에서 재벌 그룹이 차지하는 비중은 막중하다. 10대 재벌 기업의 매출액을 합하면 GDP의 절반에 육박한다고 한다. 그런데 회장으로 불리는 그룹의 총수들은 1%가 안 되는 지분을 소유하고도, 가족과 함께 그룹을 지배하고 최종적인 결정 권한을 쥐고 있다. 우리나라 경제의 절반을 1%의 지분을 가진 10명 남짓의 재벌이 경영하고 있는 셈이다. 기업의 지배구조와 지분 사이에 괴리가 발생하면서 끊임없이 그 정당성에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우리나라가 경제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는데 재벌 기업이 중심 역할을 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그러나 한편 재벌 기업은 그 과정에서 편법적인 경영권 승계, 계열사 간 부당거래 따위의 떳떳하지 못한 반칙도 꽤 저질렀다. 자식들에게 재산과 경영권을 부풀려서 물려주기 위해 각종 '창의적인' 수법을 기획하였다. 기업의 이익을 교묘히 이전시켜 상속 비용을 조달하는 속임수는 소모적이며, 기업의 수익을 늘리기 위해 시도하는 편법과도 차원이 다르다. 주주에 대한 배신이며 기업을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자해 행위다. 우리나라의 높은 상속세율로도 변명이 안되고, 재벌의 국가 경제에 대한 공헌과도 상쇄될 수 없다.
<싸우는 재벌의 자식들, 필자 브런치 글 2020.10.1.>
재벌은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막중한 비중에 걸맞게 이제 스스로 어른다워져야 한다. 치사하게 편법, 탈법으로 장난쳐서 취하는 사소한 이익은, 길게 보면 오히려 기업에 부담이 되고 비용으로 되돌아온다. 자식들한테는 재산만 물려줘도 과분하다. 경영권까지 쥐어 주려고 무리하다 깻박치는 수가 있다. 회사, 식구 모두 피곤해진다. 재벌이 국민의 신망을 받고 시장과 투자자로부터 칭찬받으면서 발전하기 위해서 무엇이 중요한지 그래서 무엇을 포기해야 할지 생각해야 할 때다.
인무원려人無遠慮 필유근우 必有近憂
사람이 멀리까지 생각하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운데 근심이 있다.
논어 위령공편 衛靈公篇 / 낭송 논어 (김수경외)
재벌은 부정직한 기업 활동의 약점을 잡혀 정권이 바뀌면 번번이 국회로, 청와대로, 감옥으로 끌려다니며 수모를 당하고 협박을 받기도 했다. 불려 가서 매를 맞던 '삥'을 뜯기던, 무릎 꿇고 고개 처박고 있는 게 최선의 전략이었고 남는 장사였다. 똥개는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는 진리를 터득한 능구렁이는, 정권의 향방에 무관하게 생존할 수 있는 면역력을 길렀다.
재벌이 업을 불리면서 범하거나 악용한 경제 질서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렇다고 해서 재벌 기업 자체를 죄악시하고 재벌의 해체가 한국 경제의 살길이라는 일부 학자나 정파의 주장은 극단적이다. 10대 기업이 우리나라 전체 법인세의 4분의 1을 낸다고 한다. 그런 논리로 하면 재벌기업이 내는 세금은 범죄수익의 일부이니 징수가 아니고 압수를 해야 하는 모순이 생긴다.
결국 정치가 개입해서 재벌을 다루기엔 기술이 서툴고 호흡이 짧다. 대못을 뽑아주고 생색내는 것도, 감옥에 보내 혼내주는 것도 정치는 나서지 말고 시장과 법에 맡기는 게 무난하다. 무엇보다 재벌 스스로가 움직이게 유도하는 게 최선이다. 우리나라에서 대기업만큼 독자적으로 국제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분야는 둘러봐도 없다. 한국의 대기업이 올림픽 메달리스트라면 한국의 정치는 전국체전 선수 정도다. 정치는 기업을 이길 수 없다. 게임이 안된다, 칼만 안 빼 들면.
재벌의 공과功過는 곱셈이 아닌 덧셈으로 평가하는 게 온당할 것 같다. 한 문제만 틀려도 빵점이나 마이너스가 돼 버리는 곱셈은 가혹하다. 맞고 틀린 문제를 더하고 빼는 채점이 과학적이다. 이광수도, 박정희도, 그리고 실패한 사랑도 그렇게 따져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