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은 약사에게,
경영은 경영인에게

선진국의 왕족은 정치를 하지 않는다.

by 영감

대기업에서 일하는 재벌 총수 일가와 임직원들 사이엔 직급에 관계없이 불가변적인 경계선이 그어져 있다. 아무리 권세가 높아도 신하가 왕족이 될 수 없듯이, 회사에서 총수와 그 가족의 위치는 절대 불가침의 성역이다. 이 완고한 '신분제' 울타리를 가운데 두고 양측의 근로 동기와 사고방식은 상당 부분 불일치한다. 선천적 모태 총수와 혈족, 그리고 말단에서 시작해서 거기까지 올라간 중역들 사이엔 그 인생의 동선이 다른 만큼 공감의 공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총수는 아버지 회장 시절부터 헌신적으로 도와서 기업을 불려준 중역들이 친삼촌보다도 미덥고, 중역들도 반평생 자기와 가족을 건사해준 직장이 고마울 따름이다. 행여나 주위에서 누가 총수 욕이라도 하면 맘이 불편해진다. 그러나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오는 업을 지켜야 하는 총수는, 뼛속까지 '월급쟁이'인 중역들의 타성을 경계하며 끊임없이 위기론을 들이댄다. 창의력 없이 진부한 애사심 하나로 버티는 중역들이 답답하기도 하고 본전 생각이 슬며시 날 때도 있다. 반면 중역들은 그 자리에서 좀 더 머무르기 위해, 도무지 논리와 일관성이 없는 주인집 식구들 말에 순명하며 회사의 궂은일을 도맡아 한다. 총수의 심기나 신변 문제에 따라 널 띠는 임원 인사는 종잡을 수가 없고 그렇다고 어디 가서 따질 데도 없다. 윗사람이 시키면 물불 안 가리고 덤비는 충정 이외에 딱히 할 줄 아는 개인기가 없으니 이제 와서 파리 목숨 취급받아도 할 수 없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젊은 세습 회장이 고분고분한 중역들의 시중을 받아가며 대기업을 끌고 가는 모양새는 ( 총수 개인의 인성과 역량을 떠나서 ) 불안하다. 배워가면서 하는 경영은 엄청난 수업료를 물 수도 있는 모험이다. 규모가 작은 사업체에서야 '내 꺼니까 내 맘대로' 하는 게 순리지만, 거대한 기업 집단의 통솔은 소유자의 권한보다는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요구되는 영역이다. 창업자의 아들이나 손녀가 동시에 경영의 귀재일 수도 있으나, 객관적으로 검증받은 다음의 얘기다.

어린 천재는 있어도 어린 장인은 없다. 기업 경영은 천재보다는 장인이 필요한 분야다.


창업해서 세계적인 굴지의 기업으로 키워낸 가문이 그 기업에 가지는 애착은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내가 낳은 자식도 크면 맘대로 안되듯이, 대기업도 창업자 식구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지분을 봐도 알 수 있다. 사람이나 기업이나, 어느 정도 뼈가 굵으면 품에서 떠나보내는 게 세상 물정이다. 창업자 가문은 업을 끌어안고 흔들지, 아니면 업을 지켜보며 키울지를 냉정하게 따져보고 선택해야 한다. 선대 창업자가 꿈꾸었던 가치가 세계적 기업인지 아니면 집안 대대 가업이었는지도.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도, '남의 돈을 관리하는 주식회사의 이사가 자기 돈을 관리하는 것과 동일한 정도의 주의를 기울이면서 관리할 것 같지는 않다'며 걱정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오늘날은 일단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자는 추세다. 학계에서도 의사 결정의 단계를 통제하여 '대리인' 위험에 대비하는 장치들을 제안하고 있다. 우리나라 재벌 그룹도 기업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전문 경영인의 영입을 고민할 때가 왔다. 미국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나 구글의 1세대 창업자까지 이미 경영에서 손을 떼지 않았는가?


우리나라 재벌 그룹이 각 계열사마다 대표이사를 두고 있기는 하나 대개는 몇년짜리 '기간제'다. 내부에서 승진하거나 발탁된 사장들이 총수나 그 측근의 관리를 받으며 제한된 재량을 행사한다. 회장의 두터운 신임과 성실한 근무 내력이 경영자적 전문성에 우선한다. 은퇴하기 전에 몇 년 예우하는 차원도 있다. 전문 경영인과 재벌 기업의 가신은 다르다. 회사에 기여한 공로가 크다고 해서 회사의 경영을 맡기는 건 후진적이다. 회사와 당사자가 모두 불행해질 수 있다. 경영 위탁은 보상이나 진급이 아니다. 주역의 지수사師 괘에는 '소인물용小人勿用'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전쟁이 끝난 후 소인은 공功이 있더라도 국가를 소유하고 정사를 다스리게 해서는 안 되니, 차라리 금과 비단金帛으로 상을 주라'라고 충고하고 있다. '소인'에는 총수 가족도 포함된다.


싸우는총수자식.JPG 삽화 연봉은 화백


재벌 2세, 3세들이 회사의 요직들을 차지하고 앉아서 하는 '경영 수업 놀이'는 이제 내려놓으세요. 골치 아프게 계열사들을 서로 꼬리 물려 투자시키고, 위장 계열사 꾸미는 장난도 쪼잔합니다. 개운하게 털어버린 다음, 총수 식구들은 품격에 걸맞게 사회문제에 한번 눈을 돌려 보세요!

<싸우는 재벌의 자식들, 필자 브런치 글 2020.10.1.>


조금 낯설고 불안하더라도, 검증된 전문 경영인을 찾아서 앉히고 그룹 전체의 운영을 맡기는 결단이 필요하다. 창업 가문이 경영 간섭을 자제하고 대주주의 권한만 행사할 때 차원이 다른 경영 혁신이 가능해진다. 그러면서 시장의 신뢰를 받아 기업의 가치도 올라간다. 내려놓으면 더 많은 게 돌아온다. 월급쟁이 사장이 못 미더워서, 물려받은 피 같은 재산을 남에게 맡기는 게 말도 안 돼서, 그럼 나중에 우리 애들은 뭐하나 걱정이 돼서... 주저하다 소탐대실한다. 그런데 문제는 전문 경영인 체제에서도 재벌기업의 장점인 일사불란한 조직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겠느냐다. 대주주의 의지와 기업문화에 달려있다.


약은 약사에게, 경영은 경영인에게 맡기세요!


다 남 맡기고 재벌 가족들은 뭐하냐고? 유럽의 왕족들이 뭐하는지 보라. 정치하는 사람은 없다.

격에 어울리고 (=폼나는) 보람 있는 활동 많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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