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믿으려면 먼저 의심해야 한다. 스타니슬라브 레친스키
ㅎ과장은 작년 3월 동생에게서 받은 한 통의 전화가 원망스럽다.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이야. 금요일 오후 혼자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데 동생이 전화를 했다. 혹시 돈 가진 거 있으면 2-3일만 썼으면... 마침 적당한 아파트가 전세로 나왔는데 주말에 누가 채 가지 못하게 오늘 계약금 좀 걸어 놔야 안심이 되겠어서... 월요일에 시댁에서 해주시기로 했으니 주말 동안만 안될까... 였다. 알아본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여유 돈 좀 있는 건 주식에 넣어 두었다. 먼저 시집간 동생이 모처럼 돈 얘기를 꺼냈는데 어떻게 하지 하다, 사장한테 좀 부탁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장은 골프 칠 때 전화를 안 받는다. 얘기할 것 없이, 회사 돈 잠깐 돌려쓰고 도로 갖다 넣으면 어쩌랴 싶었다. 어차피 사장은 요즘 회사 인터넷 뱅킹 아이디며 암호 생성기까지 모두 ㅎ과장에게 맡기고 다녔다. 재작년까지는 직접 인터넷으로 돈을 넣고 빼고 하더니 언제부턴가 ㅎ과장에게 돈 관리를 다 떠다밀었다. 이제는 자기 개인 계좌까지 맡겨 놔서, 얼마 전 사장 아들 대학 등록금도 ㅎ가 이체해줬다. 연초에 인터넷 뱅킹 연장하고 나서 사장 핸드폰에서도 변경해주었는데 한 번 안 쓴 거 같다. 동생한테 계좌번호 보내라고 하면서, 담주 초엔 꼭 갚아야 한다는 다짐을 하려다가 말았다. 그 정도 금액은 주식 팔아서 막을 수도 있다. 월요일 점심시간도 되기 전에 동생이 이체했다고 문자를 보냈다. 처음 해본 거라 약간 떨리기는 했지만, 동생 도와주기 잘했다. 즉시 회사 계좌에 메꿔 놓으니 감쪽같다. 괜히 긴장했네.
ㅎ는 그 후에도 회사 돈에 손을 댔다. 주식에 회사 돈을 갖다 넣으니까 수익의 단위가 달라졌다. 역시 부익부. 그러다 고위험 종목에 베팅한 게 크게 물렸다. 돌려 막기도 한계에 이르렀다. 거래처 사장이 돈이 제때 안 들어온다고 독촉을 해서, 깜빡했다고 둘러댔는데 아슬아슬하다. 부가세 납부일이 다가오고 있다. 지난주에 아는 증권사 직원이 다른 제안을 내놓았는데 고민 중이다. 회사 명의로 대출을 받을 수 있으면, 선물 옵션 좀 큰 거 잡아서 한 방에 털자는...
회사 법인 인감, 사장 개인 인감 모두 ㅎ과장의 서랍에 있다. 맘만 먹으면 회사도 넘길 수 있다.
돈 관리는 경리가 알아서 한다고 호기 있게 말하는 중소기업 사장들이 있다.
이 말은 마치 축구 시합에서 골은 골키퍼가 알아서 막기로 했다는 거와 같다.
기업은 돈을 들여서 더 큰돈을 벌기 위해 존재하므로 최고 책임자가 그 돈을 관리하는 게 마땅하다. 벼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라듯이 돈도 경영자의 관심 속에 불어난다. 실무팀은 경영자의 감독하에 자금의 집행, 장부 기장, 그리고 세무행정 같은 집행과 행정을 맡을 뿐이다. 기업의 규모에 따라 경영자가 관여하는 '돈 관리'의 방식은 지출 전표 결재에서부터, 자금 조달과 집행 우선순위 결정, 현금흐름 분석까지 폭이 넓지만, 어떤 식으로든지 경영자는 돈에서 손을 놓으면 안 된다. 필자가 해외 법인장으로 부임했을 때도 돈 나가는 걸 일일이 승인하면서 겨우 회사 돌아가는 걸 알게 되었다. 입출금을 승인하는 전표를 들여다보면서 돈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대강 윤곽이 그려진다.
경리 직원이 공금을 횡령한 사건들을 보면 대개 집행에 대한 경영자의 감독 소홀과 수칙 위반에 원인이 있다. 은행 입출금을 한 명의 직원에게 전담시키는 건 금고 열쇠를 떠맡기는 것과 같다. 믿는다는 미명 하에 멀쩡한 직원에게 도둑질을 권유하는 거나 다름없다. 기업에서 회계 감독은 직원을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다. 정확하고 진실한 처리를 재확인하는 절차이며, 이렇게 해야지 직원을 더 신뢰하고 오랫동안 같이 일할 수 있다. 사장이 직원을 감시하는 게 아니고, 시스템이 업무를 점검하는 것이다.
법적으로 기업은 회계 감사를 받게 되어있으며, 자산이 일정액을 넘어가면 외부기관의 감사를 받아야 한다. 감사는 원래 회계 부정이나 오류를 찾아내고 예방하기 위해 시작했는데, 현대에 와서는 주로 기업의 재정상태와 경영실적을 판정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내부감사 (자체 감사, internal audit)에서는 인간적인 오류나 실수를 유발하는 업무 절차도 지적하고 개선을 제안한다. 인간적인 오류엔 회계 부정도 포함된다. 현명한 경영자는 내부 감사 결과를 적극 반영하여 불미스러운 사고를 사전에 차단한다.
도끼에 발등 찍히고 나서 도끼를 원망하는 경영자는 어리석다.
도끼는 죄가 없다. 근거 없이 도끼를 믿은 경영자에게 책임가 있다.
확실히 믿으려면 먼저 의심해야 한다. 스타니슬라브 레친스키
To believe with certainty we must begin with doubting.
Stanislaw Leszczyns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