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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Nov 03. 2020

오래 기억하는 배고픈 고통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다시 기억함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2차 대전 때 나치 독일이 유태인을 학살하기 위해 세웠던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오스트리아 정신과 의사의 체험 수기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은 나치의 잔혹상보다는, 죽음을 앞둔 극단적인 상황에서 인간이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성찰이다. 저자는 이 체험을 바탕으로 나중에 로고 테라피라는 새로운 정신 치료법을 창시했다. 이런 공로로 프랭클이 프로이트, 아들러에 이어 세계 정신요법의 계보를 이었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따라서 책의 한국어판 제목을 보고 읽으면 주제에 대해 약간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인생의 의미라는 평범한 주제를 다루다가 뒤에 갑자기 전문적인 정신요법 사례가 나옴)  그러나 이 책을 읽은 많은 사람이 참혹한 체험을 통해 깨달은 시련의 의미를 발견하고 사물의 본질을 꽤 뚫어 보는 기회가 되어 위안을 받았다고 한다. 영문판 제목 - Man's Search for Meaning- 이 책의 내용에 더 근접한다고 볼 수 있다. 



책에서 저자는 인간은 어떤 시련에서도 그 시련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고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며 아무도 그 자유를 빼앗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자포자기해서 운명이 자기 대신 삶을 결정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비록 언제 죽을지 언제 풀려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피조물로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고통마저 감사하는 자세가 기독교 신앙과도 통한다. 저자는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의 삶의 의미를 물어서는 안 되고 자기가 바로 그 질문에 답을 하는 주체가 되어야 하며 그게 책임이라고 강조한다. 당장 겪고 있는 시련에 압도되어 자기 삶의 주도권을 내주지 말고, 시련을 저만치 떼어놓고 관찰하면서도 자기 삶을 주도하는 것이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인간의 삶을 견인하는 동기를 쾌락이나 욕구로 해석한 프로이트나 아들러와 달리, 저자 빅터 프랭클의 로고 테라피는 삶에 대한 적극적인 의미와 의지에 근거하고 있다. 저자는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으로 창작, 사람(사랑) 그리고 시련을 소개했다. 


책의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삶의 '의미'는 원저로 추측되는 독일어판의 제목 - Mensch auf der Suche nach Sinn - 을 보면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영어판 제목에서 Meaning으로 번역한 독일어 제목 중의  Sinn을 찾아보았다. 마찬가지로 의미, 센스라고 나오지만 Meaning처럼 다른 무언가를 의미하는 뜻의 타동사에서 온 동명사가 아니고 Sinn 자체가 명사로서 독립적인 뜻을 갖고 있다. Sinn 의 어원을 찾아들어가 보면 '가다' '추구하다'가 딸려 나온다. 목적, 추구 등의 적극적인 뜻이 저자가 의도한 '의미'임을 추측할 수 있다. 지금 삶의 의미를 모르겠으면 그냥 앉아 있지 말고 찾아 나서라!

<제가 속한 독서 동아리의 독후 소감을 인용했습니다.>






나는 이 책 내용 중에 수용소에서 그들이 겪은 굶주림의 고통에 유난히 공감이 갔다. 오래 전의 짧은 기간이지만 많이 배고팠던 기억이 살아났다. 책에서는 수용소 사람들이 자주 꾸는 꿈이 빵과 케이크 담배 등이었다는 것과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경험했던 영혼을 파괴시키는 정신적 갈등을 설명하고 있다. 사람의 식욕은 다른 본능적 욕구와는 차원이 다르다.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다. 배고픔에 대해 일정 기간 적절한 대응이 없으면, 죽는다는 절실한 신호를 고통이란 수단에 실어 보낸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먹을 것을 해결하는 데 집중하라는 생존의 매뉴얼이 다른 욕망과 그에 관련된 사고와 행동은 일시적으로 마비시킨다. 책에서 얘기한 영혼이 파괴되는 상황이 도래하는 것이다. 


군에 입대 후 훈련받을 때 비록 몇 주의 짧은 시간이지만 나와 동기 훈련병들은 (아마도) 난생 처음으로 배고픔이 얼마나 지독한 고통이 될 수 있는지를 체험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당시 6주 신병 훈련을 마치면 자대로 보내는데 일부 병력은 그전에 후반기 교육이라는 걸 보냈다. 물론 당사자의 의사와는 무관한 일방적인 명령이었다. 나는 부산에 있는 교육대로 보내졌는데 일단 논산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만 해도 맘이 훈훈해졌다. 계절도 춘삼월이었다. 하루 종일 박박 기고 뒹굴던 논산 훈련소에 비하면 그곳은 갑자기 학교 기숙사에 들어간 듯 차분하고 좋았다, 한 가지 빼고는.


하루 종일 교실에 앉아서 학과 이론을 배우고 실습하니 칼로리 소모량은 논산 훈련소 시절과 비교해 삼분의 이도 안 될 것 같은데 배가 고팠다.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는데 우리들 눈엔 분명히 논산에서 보다 밥이 아주 적었다. 칼로리 적게 쓴다고 줄였나?


다만 몇 주일이었지만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나오는 굶주린 고통을 비슷이 상상할 정도는 되는 경험이 시작됐다. 가장 행복한 순간은 하루 세 번 '입장'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식당에 들어갈 때였다. 밥을 플라스틱 식기에 퍼주면서 배식하는 이는 주걱으로 밥을 부풀렸다(='후까시' 를 넣었다.) 밥을 받아 식탁으로 가면서 식기를 좌우로 흔들면 밥이 푹 꺼졌는데 그걸 기간병한테 들키면 얻어맞았다. 왜 때렸는지 이유를 아직도 정확히 모른다.


온통 먹는 것만 생각했다. 쉬는 시간에 동기들끼리 얘기하는 과거와 현재는 전부 '먹었던 것'과 '먹고 싶은 것'이었다. 미래는 없었다. 앉은자리에서 찐빵 스무 개를 먹는 게 가능한 가에 대해 격렬하게 논쟁했고 그럴수록 허기와 허탈감은 더해졌다. 나는 두 달 전 논산 훈련소 입대하는 날 점심때 안성 (본적지 별로 집결시켜서 논산으로 데리고 감)의 중국집에서 먹다 남긴 볶음밥을 맘속에서 끝없이 되새김질했다. 그때 남긴 밥이 아까운 것보다 밥을 남긴 나 자신을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다. 동기 중에 하나가 어쩌다 의무대 같은데 끌려가서 청소해 주고 밥을 한 그릇 더 얻어먹었다고 하는 날이면 우리들은 부럽고 샘이 나서 미치는 것 같았다. 빅터 프랑클이 책에서 얘기한 '시련에 압도되어 도덕적 정신적 자아를 놓아버린' 경우에 해당된다.


입교해서 며칠 지나자 취사장에서 보조 인원 몇 명을 모집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야 하고 힘든 작업이라고 미리 경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밥은 실컷 먹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서 지원자가 '구름같이' 몰렸다. 경쟁이 치열하면 쓸데없이 전형이 까다로워진다. 태권도 실력으로 일차 추린다는 소리를 듣고 나는 포기했다. 최종 면접을 거쳐 '취업'에 성공한 '인재'들은 취사장에 첫 '출근'한 날 밤 변소 들락거리느라고 잠들을 설쳤다.


논산 훈련소처럼 학교 내에도 피엑스가 있었는데, 크림빵이나 부라보콘은 떠나온 사회를 잠시나마 맛볼 수 있어 베스트셀러였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선배들이 지키고 서서 신입생들은 첨 2주 동안 피엑스에 못 들어가게 단속했다. 불과 2-3 주 먼저 입소한 애들이었다.


교육대 근처에는 꽤 큰 빵 공장이 있었다. 밤이면 학교 담 근처에 있었던 (옥외) 변소의 소변기 앞에 서서 빵 공장으로부터 바람결에 실려오는 빵 냄새를 맡는 게 그나마 낙이었다. 빵 냄새가 비교적 진하게 풍기는 시간대를 동기들끼리 공유하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지금도 길을 가다 어디서 빵 공장 냄새 ( 빵 냄새와는 다름 )가 나면 묘한 기분이 된다. 


당시는 훈련소나 교육받는 기간엔 휴가는 물론 면회도 안됐다. 그런데 교육대는 교육 기간에 딱 한 번 비공식으로 면회가 허용했다. 학교 정문 옆 면회실에서 삼십 분 정도 식구가 싸온 음식을 먹다 마는 정도였다. 시간이 부족하니 한 손으로는 닭다리를 입에, 다른 한 손으론 떡과 과자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면회 온 엄마는 아들이 아귀처럼 혈안이 되어 음식을 삼키는 걸 보고 충격을 받으셨다고 한다. 면회 끝나고 나올 때 주머니에 있는 음식은 모두 버리고 들어가야 했다.


극심한 고통은 세월이 흘러도 흉터처럼 흔적이 남는다. 강렬한 감정적 충격이 정신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는 걸 트라우마라고 한다. 기간보다 충격의 강도가 문제다. 강도 높은 유격 훈련은 육체적 인내심과 심리적 공포를 감내해야 하지만 적진에 침투하여 기습 공격하는 고난도의 작전을 익히는 목적이 있다. 부당한 배고픔과는 달리 기억은 하되 상처는 아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가 한 말이라고 이 책에서 인용하고 있다. 


그때 거기서 왜 그렇게 밥이 부족했는지 이유를 나는 확실히는 모른다. 적어도 극기훈련이나 병사들의 비만을 걱정해서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학과 교육 위주인 교육대에 와서 갑자기 식욕이 생긴 건 더더욱 아니다. 만일, 유사시 나라를 위해 몸 바칠 청년들이 먹을 정량定量을 누군가 건드린 것이라면 그건 반역이다. 안 그래도 갓 입대해서 모든 게 생소하고 불안한 젊은이들의 사기를 꺾고 전투력을 저하시키는 행위는 심각하다. 아직 나라의 식량을 완전하게 자급하지 못할 때였지만 군량軍糧은 우선적으로 할당했다고 알고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왜 그랬는지 지금 다시 묻고 싶다. 그때 얘기하지 못하고 왜 한참 지난 이제 와서 그러냐고 물으면? 아무리 고통스럽고 비참해도 목숨을 내놓고 따져 물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훈련소에 입소한 다음날 훈련 조교로부터 정신이 버쩍 드는 경고를 받았다. '너희 새끼들은 인간도 아니다. 몇 놈 땅속에 파묻어도 아무도 모른다.' 효과적인 협박이었지만 군인정신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당시 수많은 청년들이 군대에서 겪은 고통이 흔한 군대 얘기(=썰) 감으로 쓰고 버려졌다면 다행이겠지만, 아물지 고 내상으로 숨어있다 삶의 모퉁이에서 불쑥 덧이 나고 진물이 흘렀다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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