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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감 Nov 14. 2020

테레비 뉴스는 그냥
아나운서가 읽는 게 좋겠다.

이따위로 말하면 우리말 오백 년도 못 간다

예전에는 테레비 뉴스 프로그램에 아나운서가 나와 원고를 읽어 내려갔는데 지금은 보도 제작에 참여한 '앵커'가 뉴스 프로그램까지 직접 진행한다. 해당 취재기자에게 보도를 분배하고 필요시 전문가를 불러 의견을 묻는 입체적인 진행이다. 앵커가 뉴스를 주도하는 방식은 미국의 거대 방송 네트워크인 CBS 등에서 이미 1950년대부터 채택한 방식이라고 한다. 요새는 뉴스의 매체가 소셜 미디어로 분산되어서 그런지 테레비 뉴스를 안 본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우리나라 테레비 뉴스는 참 매끄럽게 진행한다. 방송은 워낙 많은 사람들이 보는 매체라서 그런지 물 흐르듯 이어지도록 각별하게 신경을 쓰는 것 같다. 방송 도중에 돌발사태가 벌어지는 걸 방송 '사고'라고 부를 정도다. 특히 뉴스 같은 생방송 프로그램은 더욱 긴장들을 할 게 분명하다. 뉴스를 보고 있으면 미리 만들어진 일종의 각본에 따라 빈틈없이 진행한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다 보니 다소 획일적이고 경직된 진행으로 뉴스 프로의 생명인 생생한 현실감을 깎아먹는다. 


보통 두 명의 남녀 앵커가 기사 (그 사람들은 '꼭지'라고 부르는 것 같음) 별로 번갈아 가며 읽는데 책상 위에 있는 원고를 보지 않는 걸 보면 필시 '프롬프터'라고 부르는 대본 스크린을 읽는 것으로 짐작한다. 자기 말과 대본의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방송 분량이 많아 상당 부분 대본에 의지하는 것 같다. 앵커는 뉴스 중간에 수시로 국내외 현장의 취재기자를 연결하거나 취재원, 전문가들을 불러낸다. 시청자를 대신하여 궁금한 걸 보충하면서 진행과 동시에 보도 내용을 생동감 있게 완성해가는 데 뉴스 앵커의 존재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앵커와 기자 사이에 착착 맞아떨어지는 문답 장면을 보면 미리 말을 맞추었다는 의심을 하게 된다. 앵커가 불러서 시작한 얘기를 기자가 일방적으로 끝내는 걸 봐도 알 수 있다. 처음엔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며 앵커의 질문에 대답하던 기자가 한 10초가 지나지 않아 다른 장면에 가려지며 쪽지나 휴대전화에 저장된 원고를 읽기 시작한다. 촬영기자와 신호가 잘 안 맞으면 그 광경이 화면에 나와서 들키고 만다. 기자가 취재한(보고 들은) 실시간 현장 상황을 자연스럽게 얘기하면 되지 (숫자 등을 제외하고 ) 그걸 써놓은 다음 외우거나 읽느라고 애쓰는 건 낭비가 아닌가 생각한다. 아이스크림은 녹였다가 다시 얼리면 맛이 없다.


묻는 앵커나 대답하는 기자나 상대방의 얘기를 듣고 대답을 결정하고 다시 질문을 이어가는 게 자연스럽고 정보의 내용도 충실해진다. 방송기자가 신문기자와 다른 점이다. 즉흥적인 대화를 하다가 진행이 매끄럽지 않을 수는 있지만 정보의 생생함이 우선이다. 


방송 진행이 밋밋하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형식에 변화를 주려고 노력하는 것을 본다. 요새는 두 사람이 서서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방식도 도입했는데 목적은 자연스러운 '연출'이겠지만, 오히려 그놈의 연출 때문에 부자연스러워진다. 서있는 출연자들의 손 처리도 어색하다. 아니 어쩔 줄을 모른다. 저마다 대문짝 만한 A4 지를 들고 서있든지 볼펜으로 두 손을 연결한다. (프롬프터를 읽으면서) 보지도 않을 서류를 들고 있는 건 연기이자 일종의 시청자 기만이다. 우리는 동료나 가족과 얘기할 때 빈손으로도 자연스럽다. 자신 없으면 그냥 앉아서 하든지... 애처롭기까지 하다. 


뉴스 말미의 일기예보는 젊은 여성들이 도맡아 하는데 기상 관련 전문성은 없어 보인다. 내용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준비해 준 원고를 읽으니까 또 하나의 연기가 되어 말과 손동작이 따로 놀고 서투른 춤을 추는 듯하다. 내용은 뒷전이고 전달자와 화려한 복장만 부각하는 '보여주는' 방송이 된다. 혹시 시청자가 이런 걸 좋아해서 그런다고 변명한다면 그건 시청자에 대한 모욕이다. 우리 국민의 수준이 언론만큼 후진적이지 않다. 미국 방송에선 일기예보를 대개 전문가가 나와서 자기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알려주는' 일에 집중한다. 임신한 여성이 출연해 예보를 진행해도 우리 방송보다 자연스럽다. 일본에서는 손 대신 막대를 가지고 예보 화면을 정확히 짚어가며 역시 알려주는 방송을 하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자기 얘기를 하느냐 원고를 읽느냐의 차이에 있다. 얘기와 원고는 무엇이 다른가. 얘기는 말이고 원고는 문장이다. 그리고 얘기는 방송의 이점이자 특징이다. 술술 말로 하면 될 것을 억지로 한자어, 문어로 각을 잡고 문장으로 꾸며 놓으니 외우기도 어렵고 전달력도 떨어진다. 자기 말을 하는 사람은 외우지 않아도 되고 동작이 자연스럽다.  







방송 뉴스의 핵심 가치는 각본에 의한 원활한 진행보다 취재 내용의 빠르고 생생한 전달이다. 기자가 취재한 걸 앵커의 진행에 따라 현장감 있게 전달하는데 작가니 큐시트니 대본이니 하는 기능은 시청자들에게 좀 의아하다. 앵커와 기자가 미리 짜 놓은 계획대로 따라가려다 보면 '연기'가 되고, 연기는 수없이 반복 연습을 해야만 자연스러워진다. 그게 영화나 연극이다. 뉴스는 만들거나 연출하는 장르가 아니고 연습할 시간도 없다.  


이럴 바에야 뉴스를 직접 취재하고 다루는 앵커가 뉴스 프로그램까지 진행하는 의미가 별로 없다. 차라리 예전으로 돌아가 보도본부에서 미리 작성된 뉴스 원고를 대본이나 각본에 따라 아나운서가 읽는 것이 산만하지 않고 전달력을 높이지 않을까 한다. 좀 더 생동감 있게 전달해야 한다면 전문 성우를 동원하여 연기를 하는 편이  앵커의 판에 박힌 진행보다 덜 지루할 것 같다. 


문제의 근본 원인은 본말의 전도에 있다. 


언론이, 

- 우리말을 제멋대로 사용해서, 

- 본래의 목적인 알리는 일보다

- 꾸미고 보여주는 데만 치중하다가 

- 뉴스를 쇼로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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