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아, 나는 너를 선의로 대하겠다

by Min

세상이 나를 억까 할 때가 있다.


오랜 방황 끝에 겨우 쥐톨만한 경제력을 갖게 되어 비로소 저축이란 걸 해보려니 은행 금리가 바닥을 치고 있는 것. 지푸라기라도 찾다 청년도약 머시기 적금이 눈에 띄었지만 국가가 나서서 너는 청년이 아니라는 것. 투자라도 해볼까 들어간 주식이며 코인이며 어쩜 사기만 하면 죄다 떨어지는 것.

아 이건 그냥 내가 잘못한 건가?


중학교부터 꼬부라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자유도가 선을 넘어버린 곱슬머리. 그마저도 슬금슬금 보이는 탈모 증세와 흰머리. 벌써 10년을 넘게 함께 한 이마주름과 팔자주름. 작지 않다 으르렁 대지만 누가봐도이리봐도조리봐도 작디작은 키.

하 고생했다 내 자신.


중요한 발표날엔 꼭 USB가 말썽이거나 포인터 건전지가 떨어지고, 오래 준비한 프로젝트는 꼭 시작 직전에 천재지변에 준하는 암초를 만나 고꾸라지고. 물 마실 틈도 없이 일하다 겨우 한숨 돌리고 있을 때면 꼭 날 싫어하는 선임이 “할거 없어요?” 라며 지나가고.

정말 그지 같은 우연이란 말이지.


와중에 억까의 절정은 이것이 아닐까 싶다.

세상이 요구한 정도에 발 맞추어 나름 성실하게 걸어왔음에도 AI, 연금, 기후변화, 고령화, 인플레이션 등의 천재지변종합선물세트로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작금의 세태.

아마 나를 비롯한 수많은 30대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우리 세대는 왜 이럴까. 하필이면 이렇게 걸려 버렸을까. 어쩜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 있나”


꼰대와 MZ 사이에 낀 어중간한 정체성으로 그 어느 쪽에도 끼지 못하고 방황하는 딱한 사람들. 요즘 사람다운 탈관습적 욕망이 이글거리지만 기존 관습의 영향이 이미 DNA 깊숙이 자리해버려, 이러면 저게 걸리고 저러면 이게 찝찝한 영 애매르송한 사람들.


그 억까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그럼에도 난 당차게 선의를 외치고자 한다.


내가 선의로 대하면 세상도 날 선의로 맞아 주겠지, 와 같은 순진한 낙관이 아님을 미리 밝혀두겠다.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거든. 선의를 선의로서 봐주기라도 하면 다행이겠다. 분명 세상은 선의란 미소를 띈 나의 뒤통수를 다시금 때릴테고, 선의를 호구로 해석해 옳지 않은 접근을 해오는 모지리도 왕왕 있을테다.


그럼에도 세상아, 나는 너를 선의로 대하겠다.


그게 지난 30여년간 시행착오를 거치며 깨달은 나의 자기로움이니까. 그게 내 마음이 가장 편한 길이고, 가장 나다울 수 있는 방법이니까.


물론 마냥 웃으면서 이리저리 치이고 쳐맞고 다닐 정도로 호인은 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반격기에 인간미와 진정성이란 선의를 담아 정갈하고 경건하게.

그렇게 선의로 대하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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