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sunday farmers

스무날 만에 잠시 그친 비

by 눈항아리

지독한 비가 잠깐 멈춘 일요일이다. 태양님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게으름뱅이 일요일 농부, 오늘만은 팔을 걷어붙여야 했다. 장장 스무날을 연이어 비가 왔고 그 덕에 들깨가 거무죽죽하게 변했다. 오늘만 반짝 해가 나고 내일부터 또 일주일 비소식이 예보되었다. 그러니 매주 일요일이면 ‘하늘이시여 비를 내려 주옵소서!’ 하고 빌던 주말 농부도 오늘만은 어쩔 수 없이 부지런을 떨어야 했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 아이 넷을 키우면서 일요일에도 일하는, 일요일 농부다. 비가 주룩주룩 오던 금요일 큰 아들이 캠핑을 갔다. 신발이 다 젖어서 왔다. 비가 오면 신발이 젖는 것은 당연지사. 그러게 장화를 신으라니 장화는 싫단다. 왜 장화가 싫은지 모르겠다. 이렇게 좋은 것을. 나와 셋째 달복이, 넷째 복실이는 장화 전성시대를 보내고 있다. 비가 스무날 주룩주룩 내려도 보송한 발가락에 얼마나 뿌듯한 마음인지. 여름 장마 한참 전에 올해는 꼭 장화를 미리 준비하자 생각하며 세 켤레의 장화를 구비했건만, 여름 장마는커녕 가뭄에 빗방울 구경을 못하고 살았다. 그러다 만난 가을장마에 장화는 쾌재를 불렀다. 나는 장화를 신고 물을 박차고 다녔다. 절대 장화가 제 값을 해서 기쁨을 흩뿌리고 다닌 건 아니다. 비가 와서 나도 우울했다. 장화를 안 신고 다니는 청소년들의 다 젖은 운동화를 빨아야 한다.


비가 오면 우산 장수는 웃고 소금 장수는 울상을 짓는 건 어쩔 수 없는 이치다. 장화는 제 몫을 톡톡히 해내서 기분이 좋았지만 운동화는 젖어서 칙칙하다. 그리고 들판에서 수확을 기다리는 작물들은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벼는 익을 대로 익었다. 이른 수확을 마친 들판은 다행이라며 안도의 숨의 내쉬었다. 그러나 벼베기를 놓친 논은 울상이었다. 벼는 황금빛에서 누런 빛에서 황톳빛으로 변해갔다. 비가 내리는 와중에 수확을 했는지 어느 날 그 논의 벼는 사라졌다. 그러고도 논에 남은 벼가 있었다. 비가 계속 내리는데 낱알이 익을 것인지 어쩐지 물을 잔뜩 먹어도 괜찮은 것인지 어쩐지 그래도 수확은 해야 할 텐데 차를 타고 다니며 내내 걱정했다. 농부의 마음이야 오죽하랴. 그나마 넘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 동네 들깨는 올해 다들 늦게 심었다. 감자 수확이 끝나면 무를 심거나 들깨를 심는다. 가뭄으로 감자알이 굵지 않았고 더 키우려고 그랬는지 수확이 늦어졌다. 그나마 그냥 갈아엎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들깨는 그래서 다들 늦게 심었다. 가뭄이 한창이던 때였다. 타들어가는 밭에 양수기로 물을 대줄 기력도 없던 때였다. 그래도 살아남은 들깨는 깨송이를 달았다. 올해는 다들 순 치기 한 번 못했다. 무릎길이의 들깨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비가 계속 내렸다. 태양빛을 맞으며 영글어야 하는데 살랑 부는 가을바람에 바싹 말려야 하는데 난리가 났다. 쉬지 않고 내리는 비를 맞으며 까맣게 변하는 깨송이를 보며 농부의 속이 까맣게 같이 타들어 갔다.


무를 심은 농가들은 괜찮은 줄 알았다. 무 씨를 뿌리고 다행히 비가 내렸고 쑥쑥 자라는 듯 보였다. 비가 계속 왔지만 얼마나 초록 잎이 무성하게 올라오며 크는지 몰랐다. 그런데 배추도 무도 썩어가고 있다고 했다. 옆집 아저씨의 말을 듣고서야 알았다. 보이는 초록잎을 봐선 모른다.


비가 그친 일요일, 들깨 베는 농부의 손이 바쁘다. 비 안 오는 틈에 무 밭에 농약을 뿌리는 농부의 손이 분주하다. 벼는 그대로다. 벼는 말려서 수확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늦벼일까. 농부 님 어디를 가셨나.


일요일의 농부는 운동화를 가지고 빨래방에 간다. 벼 베야 할 농부 님네야 어련히 알아서 수확을 하시려고. 나는 젖은 운동화 눅눅한 운동화 신발장에 든 운동화를 모두 모아 여섯 켤레를 만들어 출발했다. 하늘은 파랗고 바람은 선선하고 태양은 오랜만에 만나 정말 반갑다. 들판을 달리며 우리 집 들깨 생각을 했다. 스무날 만에 비가 잠시 그쳤다. 들깨 수확이 급한 일요일 농부에게 아들의 운동화가 먼저였다.


일요일 농부의 전성기는 짧고 굵게. 2시가 훨씬 넘어서 밭으로 나갔다. 드디어 우리 집 깨를 수확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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