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물 고추를 땄다. 올해는 비도 많이 안 오고, 태풍도 안 온 이상한 여름이었다. 여름날 비 온 뒤에는 늘 은행물을 뿌리곤 했는데, 비가 안 와서 그랬을까, 일요일에 놀러 다니느라 약 치는 걸 차일피일 미뤄서 그랬을까. 올해는 딱 한 번만 천연 농약을 뿌렸다. 게으름을 피운 덕분에 고추 상태가 많이 안 좋다. 마른버짐이 핀 것처럼 빨간 고추 중간중간이 희끗희끗하고 노르댕댕하다. 멋진 등딱지를 가진 거대한 노린재가 줄기마다 잎새마다 다닥다닥 붙어있다. 매끈한 고추가 몇 개 없다. 병든 고추는 바닥에 떨구고 노린재도 털어서 떨구며 고추를 땄다. 진짜 무농약, 유기농의 참맛을 알아가는 텃밭 농사다.
마지막 고추를 따는 손길은 거칠다. 평소에는 가지가 부러지지 않게 조심조심 딴다. 줄기로 잎으로 영양분을 날라 다음번 고추 딸 때까지 무럭무럭 자라길 바라며 고춧잎 하나, 작은 가지 하나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고추 숲을 살그머니 헤치고 다니다 실수로 가지 하나라도 꺾으면 얼마나 아까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마지막 고추라고 생각하니 줄기도 이파리도 휙휙 젖히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큰 가지도 작은 가지도 마구 꺾여 나간다. 그래도 아랑곳 않고 줄기를 이리 눕히고 저리 눕혔다. 거친 손길에 빨간 고추를 따면 초록 고춧잎이 우수수 떨어지며 덩달아 바구니로 들어갔다. 고추 바구니 속에는 고춧잎이 그득했다. 빨강 고추 바구니에 빨강, 초록, 빨강, 초록, 보색의 대비가 눈에 확 띄게 아름답다. 그냥 마구 뜯어 댔으니.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고추를 따니 속도가 엄청 빨랐다. 목표만 보고 달려드니 거침이 없었다.
빨리 대충 고추를 따도 되는 이유가 있다. 내가 고추를 따는 동안 농부 남편은 앉아서 고추를 골랐다. 고춧잎을 고르고, 병든 것을 더 골라내고, 썩은 것, 물컹한 것, 벌레 구멍이 뻥 뚫린 것도 골라내고, 빨간 고추, 덜 빨간 고추를 골라냈다. 앉은자리에서 고추 꼭지까지 따서 채반에 널었다. 남편이 다 해주니 나는 그저 따기만 하면 되었다. 고추 따기가 그렇게 수월할 수가 없었다. 남편은 평소보다 많은 고춧잎을 골라내며 볼멘소리다. 고춧잎이 마르면 고추를 감싸 안으면서 달라붙어 안 떨어진단다. 남편의 고르기 솜씨만 믿어본다. 믿음직한 내 낭군 님. 이것은 내조인가 외조인가. 남편이 내 뒤를 지켜주니 든든하다. 뒤를 지켜주는 게 아니라 뒤치다꺼리인가? 훗훗 뭔 들 어떠랴. 나는 고추를 딴다. 끝물 고추를 따게 되어 기분이 좋다. 수확은 적으나 철딱서니 없는 농부 아낙은 그저 일이 줄어 좋단다. 나는 진정 참된 농부는 못 될 모양이다.
고추를 딸 때면 늘 차던 앉은뱅이 의자도 엉덩이에 안 달았다. 그래서 더 속도가 빠른지도 몰랐다. 고추보다 큰 키로 당당히 서서 고추를 땄다. 나는 고추보다 크다! 큰 키로 무언가를 내려본다는 건 은근 우월감을 준다. 정복자의 위치에서 고추를 더 잘 딸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작 고추를 위에서 내려다본다고 그런 마음이 든다니 우스운 일이다.
고작 고추에게 이겨먹으려고 그런 것만은 아니다. 아래쪽에 달린 고추는 지난번에 앉아서 모조리 따버렸다. 앉아서는 이제 고추를 딸 수 없다. 고추를 따려면 선 자세에서 허리를 굽혀야 한다.
키 큰 사람이 되어 작은 생명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무섭고 거대해 보이던 벌레보다 내가 월등하게 뛰어난 존재 같았다. 내가 커져서 식물이나 곤충을 대하는 마음의 크기가 덩달아 커진 걸까? 노린재나 꿀벌의 움직임에도 주눅 들지 않고 나는 참 씩씩하게 고추밭을 들쑤시고 돌아다녔다. 어깨를 펴고 가슴도 펴고 고추 줄기를 헤쳐가며 양손으로 고추를 마구 뜯었다. 포식자의 앞에서 몸을 부풀리는 동물들이 그런 마음으로 몸을 커다랗게 만드는 걸까? 벌레도 곤충도 나를 잡아먹는 존재가 아닌데도 나는 늘 잡아먹힐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이곤 한다.
고추를 따면서 나를 가장 위협하는 건 꿀벌이었다. 한여름을 지나 늦은 꽃을 피우는 하얀 고추꽃에 기대어 꿀을 따는지 어쩐지 윙윙 대며 얼마나 내 주위를 돌아다니는지 몰랐다. 그러나 나는 언제든 두 발을 박차고 뛸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걱정이 없었다.
쪼그리고 태평하게 앉아 고추를 딸 때는 몸이 편하다. 그러나 바로 도망가지 못한다. 반면 서서 일을 하면 굽어보아야 하니 허리가 아프다. 그러나 누군가 나를 공격해 온다면, 바로 도망갈 수 있다. 서 있는 자세는 완벽한 도망의 대비 태세다. 벌레보다 곤충보다 더 높은 곳에서, 망루에서 적들의 동태를 파악하는 보초병처럼, 무섭고 작은 벌레들의 행동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으니 마음이 더욱 안정된 것인지도.
무섭다면 더욱 당당히 어깨를 펴자. 그것이 도망가기 위한 준비 자세라도 괜찮다. 도망이 어때서?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진짜 이기는 거라고 하지 않던가.
끝물 고추를 따며, 나는 고추보다 곤충보다 컸다. 그리고 아주 조금 더 자랐다. 나를 단련시키는 자연 그리고 뒤에서 든든히 나를 지원해 주는 남편 덕분이다. 모두 나의 성장을 위해 애써줘서 고맙다.
2025년 고추 농사 끝!
이제 확 뽑아버리면 속이 후련할 텐데 가지마다 매달려 있는 남겨진 초록 고추가 눈에 밟힌다.
sunday farm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