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배우는 체스
우리는 한 집에 산다. 그러나 아들도 나도 서로의 일정으로 바쁘다. 방학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이랑 둘이 마주앉아 10분 이상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 종일 같은 같은 공간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그렇다. 가족이라는 것이 그렇게 먼 관계였던가. 아이들이 커서 독립하면 얼마나 더 멀어지는 걸까.
아들에게 함께 앉아 있는 시간이 부족함을 불평했다.
“하루에 10분 체스 둘 시간이 없어. ”
그 말에는 종일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 아들에 대한 원망이 담겨 있었다. 종일 책장이나 넘기면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엔 소홀한 나에 대한 원망도 담겨 있었다.
그러나 아들은 너그럽다.
“좀 전에 엄마랑 과자 먹었잖아. 같이 할머니 집에도 다녀왔고, 밥도 먹고 왔잖아. ”
나는 아들과 일대 일로 놀 시간이 없었다는 걸 얘기했는데 아들은 가족과 함께한 시간이 만족스러웠나 보다. 그래도 체스 한 판 둘 시간이 없었던 건 너무했다.
“오늘은 체스도 못 배웠잖아. 그럼 하나만 알려주라. 캐슬링이 뭐야?”
체스 게임은 못 했지만 하나라도 배우려고 책을 펼쳤는데, 당췌 이해할 수 없었다. 첫장에서 딱 막히니 더이상 진도가 안 나갔다.
“캐슬링은... 킹과 룩을 한 번에 움직일 수 있는 거야. 킹과 룩을 한 번도 안 움직였을 때, 킹과 룩 사이에 말이 없을 때.”
분명 달복이 아들이 그렇게 얘기했다. 그 후로도 뭔가를 계속 얘기 했는데 알아들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체스 이야기를 하려면 머릿속에 체스판이 그려져야 하는데 나는 아직 머릿속에 체스판이 그려지지 않은 게 가장 큰 이유 같았다. 아들은 계속 설명을 했다.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남편이 빨리 자자고 했다. 새벽 1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그래도 아들은 설명을 했다. 소곤소곤 소곤소곤. 잠결에 그게 뭔 말인지 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새벽의 알람이 줄기차게 울렸다. 다섯 시간도 채 못자고 일어났다. 큰아들 방에서 알람이 꺼지지 않았다. 7시에 깨워달라는 큰아들의 알람소리였다. 그런데 왜 5시부터 울리는 것일까. 새벽의 깸은 주부에게 많은 일들을 하게 해준다. 늘 그렇듯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돌리고 나니 잠이 확 깬다. 새벽의 어둠 속에서 다시 체스 책을 펼쳤다. 캐슬링을 공부한다.
책을 봤을 때도, 아들의 설명을 들었을 때도 모르겠더니. 다시 책을 펼쳐 글자를 읽으니 이해가 되었다. 먼저 글자가 이해가 되었고 뒷장을 넘겨 그림을 보니 단박에 알게 되었다. 시간은 좀 걸렸지만 실전이 아니어도 배울 수 있다. 느려도 배우는 건 배우는 거다.
캐슬링
캐슬링은 초반에 하는 것이 좋다.
한 게임에 한 번 할 수 있다.
킹과 룩 사이에 아무도 없을 때, 킹과 룩을 한 번도 안 움직였을 때 할 수 있다.
킹을 먼저 룩쪽으로 움직인다. (꼭 킹 먼저!) 무려 2칸.
룩은 킹을 뛰어넘어 옆에 설 수 있다.
단, 체크를 피하기 위해서는 캐슬링할 수 없다.
캐슬링하는 이유
캐슬링은 전투력 강한 룩을 중앙에 배치하고,
킹을 외곽에서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목적이다.
킹을 지켜야하니 킹 앞쪽의 폰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다.
룩과 폰이 캐슬링한 모습은 킹이 성에 둘러싸인 모습 같다.
캐슬링을 배우며 체스의 변화무쌍한 규칙에 대해 다시 한 번 놀랐다. 킹이 두 칸 갈 수 있었나? 다시 한 번 규칙을 찾아봤다. 킹은 방향에 상관없이 한 칸 맞다. 그런데 캐슬링에서는 두 칸이다. 나이트만 뛰어넘을 수 있는 거 아니었나? 아니다. 캐슬링할 때 룩은 킹을 뛰어넘는다. 지난 번엔 앙파상처럼 이상한 규칙이 튀어나오더니 오프닝부터 골치아프다. 이런 세세한 규칙을 모두 숙지해야 한다니! 머리가 터지지는 않겠지. 걱정이 된다. 아들아 엄마가 이렇게 열심히 공부한단다. 새벽부터 책을 파고있단 말이다! 오늘은 한 게임 부탁해. 가르침을 주시오!
그런 나의 외침을 들었는지 잠 자던 달복이 아들이 깜깜한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책상에 앉은 나를 향해 다가와 꼭 안아준다.
“엄마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체스 책을 펼쳐놓고 공부 열심히 하는 나를 아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니 나는 행운아다. 엄마가 이렇게 노력한단다. 아들이 나를 대견한 눈으로 쳐다본다.
‘엄마는 대체 이 새벽에 무슨 체스 공부람?’
그런 생각은 아니겠지 설마?
“좀 더 자.”
따뜻한 아들의 품이 멀어졌다. 아쉽지만 이 새벽에 체스 판을 펼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어린이는 푹 자야 하니까, 새벽 잠 없는 나이든 나와는 다르니까. 아들은 멀어졌지만 마음이 연결된 것 같았다.
공통 관심사는 서로를 연결하는 끈끈한 끈과 같다. 아들과 마음과 마음으로, 체스로 연결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이들이 아빠랑 함께 게임을 할 때도 그런 기분이 들까? 낮에 큰아들이 남편에게 그랬다.
“게임을 같이 하면 부모와 자녀 사이가 좋아진대.”
늘 함께 게임을 하는 아빠를 존경하는 말이었다. 나는 게임에는 영 취미가 없지만 한 번 더 게임에 도전해볼까 하는 생각도 아주 조금 든다. 매일 땅굴만 파다 죽어서 투덜거리기만 하는 그런 게임이 뭐가 재밌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함께하기 위해서 내가 한 발 다가가야 한다는 거다. 어린이 책으로 체스를 배우고 아이에게 배움을 청하는 것처럼 나를 낮추고 내가 먼저 한 발 다가가야 한다. 그들의 관심사를 끌어올 수 없다면 내가 그들의 관심사 속으로 들어갈 수 밖에. 그런 의미에서 아들들과 게임을 하며 종일 즐겁게 보내는 남편에게 존경을 표한다. 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