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신중히

아들에게 배우는 체스

by 눈항아리


“말을 한 번 움직일 때 신중하게 생각해야 해. ”

달복이가 말했다.


“맞아, 말을 할 때는 여러 번 생각해야 해. 특히 비난의 말을 할 때는 더 많이 생각하고 말을 내뱉어야 해. ”

내가 말했다.


“엄마 그 ‘말’이 그 ‘말’이 아니고 체스 ‘말’ 말하는 거 같은 데요?”

막내 복실이가 말했다.


지난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이에게 말의 신중함에 대해 얘기했었다. 나는 그 연장선에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달복이는 요즘 체스를 나에게 가르치고 있으니 체스에 대한 배움을 전달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우리가 생각한 ‘말’은 서로 다른 말이었지만, 이 ‘말’이나 저 ‘말’이나 신중해야 하는 건 똑같다.



입에서 음성언어가 흘러나올 때 나에게 뇌는 없는 것 같다. 아무런 여과 없이 생각 없이 걸러짐 없이 그저 튀어나온다. 아이들에게 고래고래 괴성을 내지른다. 잔소리란 사랑의 언어라 교묘히 정의하고 사사건건 아이들에게 간섭의 말을 내뱉는다. 어른으로서 권위를 내세워 커다란 목소리로 아이들의 말을 얼마나 잘라먹었는가. 아이에게 말을 전할 때도 신중하게 여러 번 생각하자. 말에 존중과 사랑을 담자.


경솔한 언어습관은 행동에서도 나타난다. 체스 말을 옮길 때 나의 뇌는 가출을 한 것 같다. 그저 손으로 집어 무심히 말을 움직인다. 나에게 가장 만만한 말은 나이트다. 뛰어넘기가 되니 말발굽을 높이 들어 폰을 넘어 앞으로 전진한다. 그 한 수만 기억이 나고 그 후론 깜깜이다. 그 다음으로 만만한 폰을 앞으로 움직일 뿐이다. 손이 혼자서 행동을 하는 것 같다. 그렇게 영혼이 가출한 채로 말을 움직이다 말이 움직이는 규칙조차 깜빡 잊고 말았다.


달복이의 폰은 두 칸 앞으로 진출해 중앙을 향해 오고 있었다. 상대의 말은 볼 겨를이 없었다. 폰은 곧 졸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나의 폰은 한 칸씩 천천히 전진만하고 있었다. 폰은 대각선으로 공격한다는 사실도 잊었다. 공격을 잊은 나의 폰은 상대의 공격도 예상하지 못했다. 내 말이 움직이는 것도 살피기 힘든 판국에 달복이(상대)의 말이 어디에 있는지 보였겠는가 말이다.


달복이는 비숍을 대각선에 놓았다. 언제 왔는지 모른다. 나의 폰이 죽을 판이고, 그 뒤에 나의 나이트가 죽을 판이고, 그 뒤에 나의 룩이 죽을 판이었다. 핀은 고정이다. 메모판에 메모지 하나를 핀으로 고정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 쉽게 생각했다. 핀은 창과 같다. 긴 창에 줄줄이 적을 꿰는 기술이다. 기본만 알고 뛰어든 전장에서 나는 처참히 무너졌다.


생각 없이 기물에 손을 가져다 댔다가 달복이에게 혼나기도 했다. 이걸 움직일까 저것을 움직일까 나름 고민하면서 기물의 머리를 살살 만진 것인데... 기물을 만지면 움직여야 한단다. 규칙이란다. 낙장불입 뭐 그런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런데 예외가 있다. 금을 밟았거나 해서 기물을 정리하고 싶을 때는 ‘자두브’라 외치고 만질 수 있다.


또 배웠는데 앙으로 시작하는 말이었는데, 앙팡 아니고, 앙상블도 아니고, 앙금은 더더욱 아니고... 결국은 책을 뒤적였다. 앙파상이다. 폰이 두 칸 앞으로 전진할 때 상대 폰이 내 폰을 낚아채듯 중간에서 잡을 수 있는 규칙이다. 이상한 기술이 툭 튀어나온다. 이 규칙은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모른다면 바로 잡힐 수 있는 규칙이다. 한 발 내딛기가 불안해진다. 살기 위해 나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초보인 나에게 체스의 세계는 깜깜한 밤 보이지 않는 길을 걷는 것 같다. 알 수 없는 길은 험난하기만 했다. 밤길은 더욱 조심히 살피며 걸어야 하는 법인데, 내 발아래 정도는 비춰줄 등불 정도는 미리 준비해야 하는데.


공부가 답이다. 나는 다시 어린이 체스 책을 펼쳤다. 기본을 익혔다고 덮어버린 책이었다. 말은 신중히, 신중을 위해 공부를, 공부를 하면 졸리다. 이 나이에 퇴근 후 체스 책을 보다 책상에서 깜빡 졸았다. 나는 너무 학구적이다. 실전이 필요한데 아들은 토요일, 게임의 밤을 즐기고 있다.


자두브
체스에는 터치 무브 규칙이 있다. 말을 만지면 반드시 움직여야 한다. 말을 만지기 전에 “자두브” 또는 “정리합니다”라고 외친 뒤, 넘어진 말이나 비뚤어진 말을 정리한다.


앙파상
상대 폰이 두 칸 전진할 때, 내 폰 옆을 스쳐 지나갈 때, 바로 다음 수에 한해서, 지나가면서 잡는 특수 규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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