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배우는 체스
초보가 터득한 체스의 시작을 살펴보자. 책이 알려준 바로는 폰을 중앙에 배치하는 것이 중요하다. 폰이 비숍의 길을 막지 않도록 한다. 나이트, 비숍을 먼저 진격시키고 퀸은 섣불리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캐슬링을 초반에 하라. 책의 일부 내용을 암기한 초보, 한판 승부를 준비한다.
가장 먼저 나이트를 움직이는 걸 좋아했다. 그러면 왠지 먼저 진격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나이트를 움직이면 달복이는 늘 폰을 두 칸 앞으로 움직인다. 어느 폰을 움직이는지는 한 번도 고려해 보지 않았다. 아들이 폰 이후에 어떤 말이 움직일 것인지도 고려하지 못했다. 한 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나는 여전히 내 말만 본다. 그러나 내 것을 어디로 움직여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아들이 폰을 움직였으니 그제야 나도 폰을 움직인다. 이때 늘 아들의 비숍이 진격한다. 아들 비숍이 단번에 장거리를 달려와 내 킹을 위협한다. 때로는 섣불리 움직이지 말라던(책에서) 퀸이 초반에 나와 내 퀸을 잡아가기도 한다. 내 폰이 뚫리고 상대의 폰이 없어진 것을 모르고 있다 상대의 퀸이 8 랭크 제자리에서 출발해 1 랭크에 있는 나의 퀸이 잡히는 어이없는 경우도 있다. 초반에 퀸을 잃으면 상실감이 크다. 상대가 말을 움직였다면 생각해야 한다. 적이 노리는 게 뭘까.
나는 이제 나이트를 먼저 움직이지 않는다. 폰을 가장 먼저 움직이다. 폰 8개 중 무엇을 가장 먼저 움직일까. 비숍의 길을 열어주는 폰을 움직인다. 그런데 비숍을 움직이고 나서도 막막하다. 비숍이 바로 킹을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폰의 움직임을 막고 있는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갈 수 있는 여러 자리 중에 가장 좋은 자리를 골라 떡하니 앉는다.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면 상대를 등지고도 나를 방어할 수 있다. 때로 빈틈을 노려 공격할 수도 있다.
말 하나를 움직일 때마다 가장 좋은 위치가 어딜까 고민해야 한다. 내 말을 움직이면 상대의 말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도 예상해야 한다.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살펴봐야 한다. 될 대로 되라며 생각하기를 멈춘다면 패배뿐이다. 나는 자주 생각을 중단한다!
우리의 게임에 체스 시계 앱을 도입한 이후로 나의 생각은 더욱 다급해졌다. 머리를 비우고 시계를 누르기에 급급했다. 앞을 내다보지 않고 그저 말을 움직이고 나면 사라지는 내 소중한 가족. 죽은 말은 왜 나에게 주는 건지, 마음 아프게. 그 후에 상심해도 수가 없다.
패배자는 마음이 아프다. 처음에는 초심자의 마음이 가득 차 있어 괜찮았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니까. 그러나 조금씩 배워가고 알아가면서 달라졌다. 지는 것에 대한 굴욕감이 치밀었다. 초등 아들에게 지다니. 처음엔 절대 갖지 않았던 마음이 생기니 영 이상하다. 아들을 상대로 무슨 결투를 벌이는 것 같다.
나는 매번 진다. 아들은 동생이 보는 유튜브를 같이 보면서 설렁설렁 두는데도 이긴다. 나는 투지에 불타오른다. 이 굴욕은 꼭 갚아주겠다. 패배가 무슨 빚이라도 되는 양 그런다. 화르르 눈앞에 불꽃이 일기도 한다. 설욕을 만회할 기회는 하루에 한 번. 오늘도 마음을 다잡는다.
그런데 체스 시계를 누르는 게 성가시다. 시계 때문에 집중이 안 된다. 마음이 급해진다. 시계를 치울까 보다. 연장 탓이라도 해야 패배의 쓰라림이 좀 덜해지는 걸까.
늘 같은 시작이었다. 그 덕분에 배웠다. 아들은 초반에 비숍을 진격시킨다. 그럼 나도 그래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은 많은 패배 후에 들었다. 실패는 아프다. 그러나 그 속에서 배우는 것이 참 값진 것이다.
지는 것이 곧 이기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배움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