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배우는 체스
체스에는 이상한 규칙이 많다. 이상하고도 내가 모르는 규칙이 뜬금없이 가끔, 자주 튀어나온다. 초보인 나는 어리둥절하다. 처음 들어보는 걸 어쩌란 말인가. 더 많이 아는 아들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수용해야 한다. 배워야 산다. 규칙은 규칙이므로 지켜야 한다. 그중 억울한 규칙이 있다. 무승부 규칙.
달복이와의 승부. 나는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의외의 변수로 판세가 바뀔 수 있는 것이 전장의 룰이다. 나는 퀸을 잃었다. 기민하게 살피지 못한 내 실책이다. 이제는 나도 시야가 넓어졌다 자만하다 그런 일이 생겼다. 상대 말의 움직임을 살펴보다 내 퀸의 앞길이 뻥 뚫린 줄 몰랐다. 체스판은 정확히 대칭이라는 사실을 나는 깜빡 잊고 있었다. 내 퀸 앞의 폰과 상대 퀸 앞의 폰이 사라졌다. 잠시 잠깐 한눈판 사이 달복이 아들의 퀸이 장거리 미사일처럼 날아와 내 퀸을 잡아갔다. 이런 황당한 사건이!
그렇게 속절없이 퀸을 보내고 내 성은 속절없이 무너져갔다. 상대의 퀸이 나의 성, 나의 땅에서 종횡무진했다. 상대의 비숍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기도 했다. 상대의 나이트와 룩도 모두 밖으로 나온 상태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비숍과 나이트, 룩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내 말들은 뭘 하고 있었나? 왜 방어를 안 했지? 나도 나름 사력을 다해 도망을 쳤다. 초반에 퀸을 잃은 슬픔이 너무 컸나 보았다.
그러나 나도 놀고 있지 않았다. 나의 폰은 열심히 전진하고 있었다. 폰과 폰을 활용해 최대한 방어 태세로 전진했다. 속절없이 무너지는 주력들을 보며 나의 폰은 전력질주했다. 폰 하나가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직진. 폰의 잰걸음, 1칸 전진으로 8 랭크까지 진출해서 첫 프로모션을 획득했다. 나의 폰은 퀸으로 다시 태어났다!
프로모션(승진)이란 폰이 상대 진영 끝 줄(8 랭크)에 도착하면 퀸, 룩, 비숍, 나이트 중 하나로 바꿀 수 있는 규칙이다. 폰이 8개이므로 모두 프로모션에 성공하면 8개의 퀸을 더 가질 수 있다.
제일 좋은 퀸으로 선택하는 건 당연지사! 과연 퀸이 가장 좋은 수였을까?
나의 새로운 퀸은 왕이 있는 나의 진영으로 곧장 달려갔다. 그리고 장렬히 전사했다. 그래도 상대 말 몇 개를 처리한 후였다. 남은 것은 달복이 아들의 말 두 개. 나는 폰 두 개. 달복이 아들이 내 폰을 바로 처리하러 오지 못한 것을 보면 퀸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내 폰 두 개가 차례로 프로모션에 성공해 퀸이 되었다. 나는 다시 퀸이 생겼다. 그것도 두 개나!
퀸 두 개는 강력하다. 이런 횡재 수가 다 있나! 나는 퀸의 권력에 심취했다. 상대의 중견 말 두 개를 가차 없이 잡아버렸다. 퀸 두 개와 킹을 가진 나, 킹만 가진 아들. 승부는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그만 항복하시지? ”
그러나 아들은 묵묵히 도망만 다녔다. 갔다.
“그만 항복하라고! ”
그러나 아들은 열심히 한 칸씩 피하고만 있었다.
‘이 녀석 뭐지? 시간 끌기인가?’
나는 상대의 왕을 궁지로 몰아갔다. 결국에 상대의 왕은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
“이제 내가 이겼지?” 하는 찰나,
서서 우리의 체스판을 눈여겨보고 있던 둘째 복이가 체스판에 끼어들었다. 난입이라고 해야 옳다. 나에게는 그랬다. 청천벽력 같은 말.
“이건 무승부야. 스테일메이트라고.”
무승부라니! 내가 다 이긴 게임인데! 상대의 킹은 어느 칸으로 움직여도 죽는 신세다. 왜 내가 이긴 게 아닐까? 따져 물어도 소용없고 억울해도 소용없다. 법을 모르는 자는 결국 패배했다.
다 이긴 판을 무승부로 끝냈다. 퀸이 다 좋은 게 아니었다. 너무 강력했단 말이지. 두 개는 너무 강력했다. 그래서 폰을 프로모션 할 때 선택지가 있는가 보았다. 때로는 체크메이트를 위해 낮은말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걸 언더 프로모션이라고 한단다. 좋은 게 다 좋은 게 아니었다. 좋은 것도 정도껏.
너무 좋아하다 망했다. 게임은 무승부로 끝났지만 다 이긴 게임에 초를 치고 나니 패배했다는 기분이 지배했다.
스테일메이트. 체크는 아닌 상태. 차례가 왔는데 움직일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다면 무승부로 게임이 끝난다. 이 상황을 체스 용어로 스테일메이트라고 한다.
스테일메이트 말고 무승부가 되는 경우가 있을까? 억울하게도 많다.
두 플레이어가 서로 동의하면 언제든, 같은 상황이 3회 반복되면, 50수 동안 잡힌 말이 없을 때, 기물 부족할 때(체크메이트가 불가능한 기물만 남았을 때 자동 무승부), 상대가 시간 초과라도 내가 체크메이트 할 수 있는 말이 부족하다면 무승부!
억울한 이유는 내가 당해서 그렇다. 내가 이용하면 된다. 규칙을 알아야 승리한다.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숙지하자. 너무 많다. 용량 초과.
옆에서 구경하던 복이 아들이 공부를 좀 하라며 쇼츠 영상을 보여준다. 응원 맞겠지? 영상에서는 빠르게 기물이 이동한다. 설명을 해주는데 몇 배속은 되는 것 같다. 당최 나의 눈과 뇌가 따라가지 못한다. 아들아 엄마는 책이 좋다. 느릿하게 한 장씩 씹어 먹겠다. 현란한 세상에서 배움의 길은 멀기만 하다. 느리지만 나는 배우는 자가 분명하다.